제37대왕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이다. 할아버지는 각간 원훈(元訓)이며, 아버지는 효방(孝芳, 혹은 孝方) 해찬(海飡)으로 개성대왕(開聖大王)에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김씨 사소(四炤, 혹은 四召)부인으로 성덕왕의 딸인데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봉되었다. 비는 구족(具足)부인으로 각간 양품(良品, 혹은 狼品 또는 義恭)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양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764년 정월에 이찬(伊飡)인 만종(萬宗)이 상대등에, 아찬(阿飡)인 양상이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信忠)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金邕)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檢校使肅政臺令兼 修城府令檢校 感恩寺使角干)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肅政臺)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동왕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金周元)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선덕왕의 치적은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즉위년의 어룡성(御龍省)에 대한 개편이다.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奉御)를 경(卿)으로 고치고 다시 감(監)으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패강진(浿江鎭)의 개척이다. 781년에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安撫)하였고, 782년 한주(漢州: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民戶)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金體信)을 대곡진(大谷鎭)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 또는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의 축출을 꾀하려는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 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朝鮮金石總覽
新羅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新羅下代의 貝江鎭(李基東, 韓國學報 4, 1976)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