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유래/익재공이제현

정과정곡 (鄭瓜亭曲) - 李齊賢

在錫 2011. 8. 16. 09:55

<鄭瓜亭曲> - 李齊賢

 

憶君無日不霑衣 님 생각에 옷을 적시지 않은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蜀子規 바로 봄 산의 두견새 같 도다
爲是爲非人莫問 옳고 그름을 사람들아 묻지 말라
只應殘月曉星知 다만 응당 새벽 별만이 알리라

李齊賢의《益齋亂藁》卷四의 <小樂府>에 수록된 漢詩이다. 《益齋亂藁》에는 고려의 민간가요를 漢詩의 形式으로 번역한 11수의 漢詩가 보이는데 이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또한 《高麗史》〈樂志〉卷 71에는 이 시의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과정은 內侍郎中 鄭敍가 지은 것이다. 敍는 瓜亭이라 自號했고, 外戚과 혼인을 맺어 仁宗의 총애를 받았다. 毅宗이 즉위하자 그의 고향인 東來로 돌려보내면서 이르기를, 「오늘 가게 된 것은 朝廷의 의논에 밀려서이다. 머지않아 소환하게 될 것이다」敍는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명령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가 극히 悽悲하다. 李齊賢이 시를 지어 이 노래의 뜻을 풀이하였다.

이 시의 배경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대목으로 이 시가 다른 한시와는 달리 특정한 노래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李齊賢 의 이 漢詩에 대한 이해는 당연히 鄭敍라는 인물과 그가 지어 불렀다는 노래의 原歌辭 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정서가 불렀던 <鄭瓜亭曲>이라는 노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그 내용에 대하여 朝鮮時代의 《樂學軌範》卷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님을 그리와 우니다니     (내 님을 戀慕하와 늘상 울니)
山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山 杜鵑새 나는 비슷하오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달 아으     (참이 아니시며 虛妄이신 줄을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殘月 曉星이 아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대 녀져라 아으     (넋이라도 님은 한 곳에 가고저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우기시던 이가 누구시더니이까)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이다     (過도 허물도 千萬 없소이다)
말힛마리신뎌                    (뭍 讒言이신저)
살읏븐뎌 아으                    (슬픈저 아으)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     (님아 나를 이미 잊었나이까)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아소 님하 衷曲을 들으사 사랑하소서)

국문으로 기록된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그 작자가 확실한 노래로 전해지고 또한 忠臣戀主之詞의 내용을 담고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고등학교의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노랫말에 어울리는 리듬감 그리고 우리말의 섬세한 아름다움 등이 한껏 느껴지는 노래이다. 특히 이 노래의 뒷부분의 내용은 이제현의 譯詩에는 나타나지 않은 부분으로 譯詩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한편 고려시대에 李齊賢,李崇仁 등이 이 시를 소재로 한 詩를 남겼을 뿐만이 아니라 특히 思菴 柳淑은 임금의 명을 받아 이 시를 漢詩로 재구성할 만큼 당시에 널리 유행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와서도 宮中에서 典樂으로 중시되어 樂工들의 必須科目이 되었고, 사대부들이 꼭 배워야 되는 노래로 인식되어 애상적인 本歌가 사대부간에 모두 학습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 노래가 이처럼 중시되었던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이 문제를 따져 봄으로써 이 歌謠는 물론 益齋선생이 飜譯하여 옮긴 漢詩에 대해서도 그 이해를 올바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鄭敍라는 인물과 그가 어떻게 하여 流配를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金善豊은 《鄭敍論》에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鄭敍는 제기록을 살피건대 睿宗.仁宗.毅宗.明宗의 四代에 걸친 人物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외척으로서는 혁혁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는 宮中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恭睿太后의 지지자였다. 恭睿太后는 長子인 毅宗보다도 次子인 大寧侯 暻을 더 사랑했던 바, 敍도 同調한 나머지 晩年 20年間에 걸친 流謫의 비애를 맛본 것이었다. 大寧侯는 度量이 넓고 衆心을 얻었던 바 이에 대비하여 毅宗 乳母의 남편 宦者 鄭諴이 散員 鄭壽開를 시켜 誣告하기를 「臺吏 李份 등이 大寧侯를 추대하여 임금을 삼는다」하였고, 간신 金存中은 鄭諴의 使嗾에 의하여「鄭敍가 大寧侯와 친하다」는 말로 毅宗을 의혹케 하였다. 게다가 鄭敍의 才藝를 질투한 大臣들도 「鄭敍가 大寧后를 交結하여 그 집으로 招請하고 宴樂과 遊戱를 거듭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매 드디어 鄭敍를 그의 고향인 東萊로 追放시켰으니 때가 毅宗 5年(1151)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鄭瓜亭曲>에서 표출된 작자의 悲哀에 대한 직접적 원인이 되는 내용으로 정서의 인간적 갈등에 대하여 만인들이 공감을 표시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왠지 鄭敍와 경우를 당하여 귀양길에 올랐던 숱한 옛 벼슬아치들의 모습이 순간 떠오르기도 한다. 즉, 그 각각의 이유는 다르더라도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鄭敍의 경우와 같이 억울한 누명을 쓴 체 유배생활을 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런 경우를 당했던 인물들이 한결같이 불렀던 孤節한 思君歌의 일반적 내용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 인식상의 공통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鄭敍의 <鄭瓜亭曲> 또한 이러한 思君歌의 보편적 情緖를 충실히 반영한 노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權寧徹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보도록 하자

浮沈이 많고 宦海風波에선 벼슬아치들이라면 누구라도 거의 한 두 번 이상은 겪어야 하는 流配, 被讒의 고통이 따르고 있었는데, 鄭瓜亭의 來歷들이 그네들의 신세와도 恰似하여 자기네들의 分身인양 이것을 느껴서 소중히 익혀왔고 계승시켜 왔을 것이며. 툭히 本歌가 創作詩歌로서 거의 滿點에 가까우리만큼 잘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이를 좋아했을 것이며...

李齊賢이 번역한 시구를 들어 말하자면 작자가 ‘憶君無日不霑衣’하는 모습등은 비단 정서 혼자만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를 당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었던 당시 사대부들의 공통된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이 노래의 전반적인 情緖는 여타의 사대부들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켜 널리 유행하게된 이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이유를 말해보자면 이 노래가 가지는 忠思想 때문일 것이다. 忠思想이 古來로 우리민족의 정신지표로 脈絡되어 왔음을 감안할 때 高麗라고 그것이 단절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노래의 내용은 忠思想의 고취에 유용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능히 간신과 그들의 참언을 경계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君臣이 함께 중히 여길 만 하다. 따라서 위에서도 말한바 임금이 命하여 詩의 形態로 再構成하게 할만한 충분한 가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임금의 요구에 부합하려는 신하들의 자연스러운 호응에 힘입어 이 노래가 중히 여겨졌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럼 이제현의 譯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鄭敍의 <鄭瓜亭曲>의 앞부분에서 느껴지는 悽怨한 느낌이 충실하게 반영되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原歌辭의 뒷부분의 내용이 譯詩의 내용에서 배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漢詩의 형식적 특성에서 오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李齊賢이 이 노래의 뒷부분의 내용에 대하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특히 마직막 두 구에서 나타난 작자의 태도등은보기에 따라 약간 경박해 보일 수도 있어서 사대부가 취할 만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논평을 보자

鄭 瓜亭 노래의 「내님을 그리 와 우니다니.... 잔월효성이 알시리이다」까지는 그래도 얼마간의 詩的 분위기가 있다 하겠지만, 그 뒤를 흐르는 「 넉시라도 님은  녀져라....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라는 대목은 「노래가락」숨결에 어울리는 빠른 숨결에 매우 딱딱하고 급박한 느낌이며, 이 가운데서도 「님이 나를 하마 잊으셨읍니다」는 매우 유치하고, 마지막이 되고 있는 「아소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야말로 졸렬하고 절박한데 20년 가까운 귀양살이 中 고작 이것밖에 나올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李齊賢 같은 인물이 또한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鄭瓜亭曲>의 전반부에 나타난바에 대하여는 그 情緖를 공감할 수 있었겠으나 뒷부분에 나타난 이 같은 작자의 모습을 자신의 譯詩에 반영하기가 좀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李齊賢의 이 譯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단순히 鄭敍의 鄭瓜亭曲의 歌詞를 번역한 정도로 보기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이 노래에 대하여 李齊賢이 생각했던 나름대로의 문학적 評價를 飜譯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해 낸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