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

국당공파 소개 [국당공신도비명 역문]

在錫 2011. 8. 16. 10:14

菊堂公神道碑銘 譯文(국당공신도비명 역문)

公의 휘는 천(천)이요,字는 君實(군실)이요,菊堂(국당)은 그 號이니 新羅 及梁部大人(신라 급량부대인)휘 謁平(알평)에서 시작 되었고 여러代를 전하여 휘 金書(금서)가 있으니 三韓功臣(삼한공신)에 참여했고, 휘 潤弘(윤홍)은 大提學(대제학)이니 벼슬이 혁혁하였다.

 

또 十一代를 내려와서 할아버지 휘는 핵(핵)이니 門下評理(문하평리)로 左僕射(좌복사)에 증직되었고 아버지 휘 世基(세기)는 密直副使 大提學 檢校政丞(밀직부사 대제학 검교정승)이요, 시호는 文僖公(문희공)이며 어머니는 利川徐氏(이천서씨)니 禮賓 尹瓚(예빈 윤찬)의 따님이다.

 

공이 문장이 현저하고 벼슬이 推誠輔理功臣 三重大匡僉議政丞 知藝文館 春秋館事 文下 侍郞同平章事 月城府院君(추성보리공신 삼중대광첨의정승 지예문관 춘추관사 문하 시랑동평장사 월성부원군)에 이르고, 시호는 文孝公(문효공)이요,南原 漁隱祠(어은사)에 배향 되었다.

 

史記(사기)를 살펴보면 公이 忠烈王(충렬왕) 己亥(기해)(一二九九)年에 文科(문과) 장원에 발탁 되어 翰林舍人(한림사인) 史部郞中(사부랑중)을 지내고 忠肅王(충숙왕) 辛酉(신유)(一三二一)年에 右思補(우사보)가 되었는데 이때에 王에게 고이는 사람 李仁吉(이인길)이 그 妾(첩)의 아비를 郞將(랑장)을 시키려 하자 직접 서명하지 않으니 仁吉(인길)이 王에게 참소하여 公을 곤장 때리고 海島(해도)로 유배하니 정직한 소문이 세상에 들리었다.

 

忠惠王(충혜왕) 四年(사년)(一三四三)에 僉議商議(첨의상의)가되고 五年 三月에 원나라에 가서  郊赦(교사)를 축하 하고 六月에 書筵(서연)에 들어갔다.

 

公이 判密直司事(판밀직사사)가 되어 益齋(익재)와 및 蔡河中(채하중)·韓宗愈(한종유) 朴忠佐(박충좌)로 더불어 날을 바꿔가며 王을 뫼시고 글을 읽었고 十月에 政堂文學(정당문학)이 되었다. 忠穆王(충목왕) 乙酉(一三四五)年에 첨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약력이다.

 

일찍이 세 아우와 여러 종항으로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고 연달아 장원급제에 올라 한 문중이 빛이 나니 사람들이 平章里(평장리)와 翰林村(한림촌)으로 불렀다.閔默軒(민묵헌) 漬(지)의 시에  이르되 『빛나는 꽃봉우리는 세집의 다섯 장원이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두 謫仙 李台白(적선 이태백)의 재주라 한다』하였고 李陶隱(이도은) 崇仁(숭인)은 世科(세과)라고 했으니 대저 東菴(동암) 文定公 진(문정공 진)과 松巖 文僖公(송암 문희공) 世基(세기)와 內書舍人(내서사인) 轉(전)와 益齋 文忠公(익재 문충공) 齊賢(제현)과 및 公이 서로 이어서 장원한 까닭이다.

 

公의 제 三子인 達衷(달충)이 司馬試(사마시)에 장원하여 축하하는 손님이 가득히 찾아왔는데 白飯(백반)을 장만하니 당시에 熱飯會(열반회)라고 칭하였으니 공의 청백하고 검소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文定王(문정왕) 元年 己丑(一三四九)年 七月 癸卯(계묘)에 돌아갔다.

 

墓所는 交河郡(교하군) 北里山(북리산)에 있으니 지금에 坡州(파주) 阿洞(아동) 佰今의 子坐이니 三夫人(삼부인)을 합부했다. 四男을 두었으니 潭陽薛氏(담양설씨)는 敬中(경중)을 낳아 大匡中書(대광중서) 月城君(월성군)이요 培中(배중)은 典理尙書(전리상서)요 竹山朴氏(죽산박씨)는 竹城君(죽성군) 類(류)의 따님인데 達衷(달충)을 낳아 翊贊功臣(익찬공신) 三重大匡鷄林君(삼중대광계림군) 이며 시호는 文靖(문정)이요 淳昌朴氏(순창박씨)는 誠中(설중)을 낳아 開國原從功臣(개국원종공신) 特進輔國(특진보국) 檢校左議政(검교좌의정)이요 시호는 靖順公이다.

 

딸은 尹之彪(윤지표)에게 출가 했다. 손자에 毓(육)은 少監(소감)이요 敏(민)은 知郡事(지군사)요 穉(치)는 宣傳(선전)이니  長房(장방)의 소생이요 天瑞(천서)는 同知(동지)니 二房(이방)의 소생이요 塼(전)은 典書(전서)요 轉(전)는 密直(밀직)으로 月城君(월성군)이요 毓(육)의 아들은 廷商(정상)이요 塼(전)의 아들은 幷商(병상)이니 吏曹判書(이조판서)로 鷄林君(계림군)이며 시호는 恭懿公(공의공)이요 儒(유)의 아들은 具商(구상)이니 鷄安君(계안군)이요 寧商(녕상)은 參判(참판)이요 從商(종상)은 司正(사정(이요 興商(흥상)은 吏曹判書(이조판서)로 시호가 襄僖(영희)이고 榮商(영상)은 副正(부정)이다.

 

援(원)의 아들은 賢商(현상)이니 參奉(참봉)이요 赫孫(혁손)도 參奉(참봉)이요 扶(부)의 아들은 元商(원상)이니 監察(감찰)이요 終商(종상)이다. 携(휴)의 아들은 孝商(효상)이니 監察(감찰)이요 孝林(효림)은 判官(판관)이다.

 

아! 공이 세 조정을 섬기어 직위도 높고 덕망도 중했데 윤리가 무너지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세상에 뛰어나는 사업이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이 전함이 없으니 비록 한스러우나 그러나 諸賢(제현)들이 추중하여 말 한 것을 본다면 百代 아래에서도 족히 그 풍채를 상상할 수 있다.

 

神道(신도:墓所를 말함)에 오히려 顯刻(현각)이 없더니 後孫 善(손선) 鐘元(종원)이 家狀(가상)과 및 旁孫(방손) 정승 裕元(유원)이 지은 傳記(전기)를 싸가지고 와서 丙承(병승)에게 주며 銘文(명문(을 청하니 내가 어찌 그 글을 쓸사람이되리요  그러나 공의 평생에 大節(대절)을 의논한다면 우뚝하여 中流(중류)에 서있는 砥株(지주)와 같아서 일을 만나매 말을 다하여 험란하고 평이함을 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이 하였으니 덕이 후하면 흐르는 빛이 무궁함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후손이 번창하여 현달한 벼슬과 훌륭한 사람이 전후에 서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비록 郭汾陽(곽분양)과 中山(중산)이라도 더 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아름다워도 아름다운 척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정하여 줌을 알 수가 있다. 성대하고 빛나도다 마땅히 사기에 기록될 것이다.

 

銘(명)에 이르기를 높고 높은 先生이시여, 高麗(고려)의 忠臣(충신)이네, 임금 보좌하기로 스스로 임무를 삼았으니,  나라를 위하여 몸을 허락하였네, 때로는 칼과 창을 더하여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하였네, 公께서 小人(소인)을 배척하였으니, 君子(군자)의 굳센 의리이네, 소인이 참소 하였으니, 몇 해나 바다가에서 병들었던가, 곤액에 처하여도 道(도)는 형통하였으니, 실지의 일을 구함 이었네, 대대로 王命(왕명)을 맡았으니, 꽃같고 숲같은 文章(문장)이네, 經筵(경연)에서 글을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 열어주었네, 믿부다 仲山甫(중산보)여, 職責(직책)에 부지런하여 궐한 적이 없네, 아들같이 백성에게 사랑이 있고, 王命(왕명)을 專對(전대)하는이 끊기지 않았네, 크고 작은 그릇이 있으나, 재주와 영리함은 기뻐하지 않았네, 것과 속이 완전하고 좋았으니, 정성이 말보다 앞에 있었네, 무거운 덕망을 업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니, 마음이 이치에 합하려 하였네, 퇴패한 풍속을 진흥시키니, 그 처음을 생각하였네, 오직 공의 志氣(지기)는, 風雷(풍뢰)와 같은 조화가 회포에 들어왔네, 만일 그 장점을 시험했으면, 陰陽(음양)의 닫고 열림 이루었으리라, 화평한君子(군자)여, 하늘의 많은 부록을 받았네, 百千名의 後孫이여, 萬年을 지내며 번창하리라, 一片丹心(일편단심)으로 나라를 붙잡으니, 빛나기 삼태성과 같으네, 덕이 혹시 현달하지 않을가, 그 墓文(묘문)에 표시하노라. 先生이 돌아간지 五百七十八年 丙寅(一九二六)年 四月 하순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