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

제정공파 소개 [제정문정공신도비명 역문]

在錫 2011. 8. 16. 10:16

霽亭文靖公神道碑銘譯文(제정문정공신도비명 역문)

경주(慶州)의 탄동(炭洞)에 있는 높직하게 봉분을 만들어 五百年을 지내면서 行人까지 바라보고 공경하는 것은 高麗末期(고려말기)에 名臣(명신) 霽亭先生(제정선생)李公 휘 達衷(달충)의 묘소이다.그 後孫(후손)들이 장차 神道碑(신도비)를 세워서 오는 世上(세상)에 고하고자 하여 鍾錫(종석)에게 銘(명)을 청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公(공)의 强直(강직)한 大節(대절)이 사기에 빛이 있으며 굉장하고 청아한 文章(문장) 詩句(시구)가 文選(문선)의 모든 작가에 누누히 나와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서 公(공)의 썩지 않음이 가히 天地造化(천지조화)로 더불어 같을 것인데 그 무엇을 진부한 말의 有無를 기다릴까? 碑石(비석)에 새기는 것은 때로는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양하지 못할 자도 있다.


公(공)의 처음 휘는 達中(달중)이요, 字(자)는 中權(중권)이며, 霽亭(제정)은 號(호)이다. 先系(선계)가 휘 謁平(알평)의 後孫(후손)이고, 慶州로 本貫(본관)을 삼았다. 휘 金書(금서)가 있으니 高麗(고려)의 조정을 도와서 벼슬이 戶部郞中이고 이어서 冠冕(관면)이 있으니 曾祖(증조) 핵(핵)은 門下評理(문하평리)요,  祖考(조고) 世基(세기)는 大提學(대제학)으로 시호는 文僖(문희)요, 先考(선고) 천(천)은 大提學 月城府院君(대제학 월성부원군)이며, 시호는 文孝(문효)요, 號(호)는 菊堂(국당)이다.
선비는 竹山郡夫人(죽산군부인)朴氏니 竹城君 뇌의 따님인데 忠宣王(충선왕)己酉年(1209년)에 公을 낳았는데 公의 文章이 빛나고 민첩하며 뜻과 절개가 넓고 위대하였다.


恭愍王(공민왕) 元年에 十八歲인데 一等 과거에 급제하여 史翰 正言(사한 정언)을 거쳐 여러번 옮기어 成均祭酒(성균제주)가 되었다. 忠穆王(충목왕) 四年에 張沆 金允誠(장항 김윤성)여러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史部都監事를 맡게 되었으니 대개 극도의 선출이다.

 

恭愍王(공민왕) 元年에 典理判書(전리판서)를 배수하고 監察御史(감찰어사)로 戶部尙書(호부상서)에 전직 되었다.
이 때에 八關會(팔관회)를 창설하고 僕射廳(복사청)에서 잡된 유희를 벌리니 公이 僕射廳(복사청)위에 있으매 그 울타리를 철거하도록 명령하니 王이 성내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가 조금 후에 이름 있는 儒賢(유현)을 욕 보일 수가 없다 하여 密直提學(밀직제학)을 승진했다.


七年여름에 외직으로 東北面 兵馬使가 되었고 장차 돌아올 때에 桓祖(太祖의 아버지)가 朔方道萬戶로써 咸州(함주)의 鶴仙亭(학선정)에서 전송하매 太祖가 후측에 모시고 있었는데 술이나와서 桓祖(환조)가 술을 돌린즉 公이 서서 마시고 太祖가 술을 돌린즉 꿇어앉아 마시었다.


桓조(환조)가 괴이하게 여기어 물으니 公이 대답하기를 『이 아들은 公이 미칠 바가 아니요 반드시 家門을 大昌할 것이라.』하고 子孫으로서 부탁하였다. 후에 공의 아들이 범죄한 자가 있으매 太祖가 특별히 풀어주고 설립(立)자로서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니 데저 그 서서 마심을 기록한 것이다. 얼마 후에 王은 妖僧 辛旽(요승 신돈)에게 미혹하고 신旽(신돈)은 酒色(주색)에 음란하여 나라 형세가 안팎으로 기울어 졌으나 남들이 감히 거슬리지 못하였다.

 

公이 일찍이 여럿이 모인 가운데에서 낯대고 辛旽(신돈)을 꾸짖으며 이르기를 『사람들이 公한테 酒色(주색)을 좋아한다고.』하니 辛旽(신돈)이 公을 좋아하지 않고 드디어 파면을 시켰다. 史家(사가)들이 公을 칭하되 『强直하여 흔들리지 않는다.』하였다. 후일에 외직으로 慶州府尹(경주부윤)이 되었고 또, 輔理(보리)의 훈공으로 鷄林府院君(계림부원군)을 봉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七十六의 壽로 마치니 廢主(폐주) 辛禑十年(신우십년)甲子(1384년)八月十八日이고 시호는 文靖(문정)이다. 배위는 靖和宅主 橫城趙氏(정화택주 횡성조씨)니 政堂文學 文瑾(정당문학 문근)의 따님이요, 재취 배위는 忠州安氏(충주안씨)니 忠烈王 佑(충렬왕 우) 의 따님이요, 삼취 배위는 平壤趙氏(평양조씨)니 尙書 千裕(상서 천유)의 따님이다.다음은 궐 한다.

 

公은 文學이 우수하고 도량이 원대하여 크게 당숙부 益齋先生(익재선생)의 器重(기중)하는 바가 되어 國史를 편찬하매 公과 및 白忠簡公 文寶(백충간공 문보)로 더불어 紀年傳(기년전)을 제작하여 드디어 完史(완사)를 성취하였고 기타에 著作(저작)의 성대함이 혁혁하여 옛날에도 드물었는데 滄海(창해)와 桑田(상전)이 여러번 변하므로 판각이 불타 버리어 百千에서
하나둘도 보존하지 못하고 詩文(시문)의 남은 자가 겨우 약간의 편질에 불과하나 오히려 공의 지킨 바를 생각하며 학문의 근본이 있음을 알겠다.


지은 詩가 함축성이 있고 웅장하여 浮華(부화)를 숭상하지 않으며 호탕하였으니 반드시 예에 그치고 원망하고 비방하여도 어지러움에 비치지 않고 전진으로 나아가 風雅(풍아)의 소리가 있었다. 圃隱 鄭文忠公(포은 정문충공)이 일찌기 淸瀾정(청란정)에서 公의 遺像을 절하여 뵙고 詩를 지어 이르되 『가문에 유전하는聲烈은 忠이 孝에서 옮겨오고 世上을 덮는 文章(문장)은 도학이 儒業(유업)을 일삼았네라.』하였으니, 아 ! 公을 알았다.하겠으며 나도 公에게 疑心(의심)이 없노라. 銘(명)에 이르되, 마음이 곧은 것은 공경이니,그러하면 動(동)도 靜(정)이리라. 한 말로 이르자면 어둔 거리에 홀로 밝힌 등불이네. 의리를 인식함에 정밀하였으니 이러한 本領(본령)을 確立하였네. 이미 그 쌓음이 풍부하고 또한 그 의리를 잡음도 확실하였네. 나머지 일에 발견하여 문채가 빛나고 밝았네. 王庭(왕정)에 드날리니 珪(규)도 되고 珽(정)도되었지. 百官 同僚(백관 동료)가법칙을 삼았으니 누가 음란함을 들어낼까 임군을 도로 이끄니 감히 잠깐인들 잊으랴? 잠시 물러나고 잠시 들어오니 좁은 소견으로 고집을 취함이 아니네. 한 줄기 향불 밝은 창에 一片丹心(일편단심)이 밝고 밝았네. 학문에 부지런하고 고종명으로 마치었으니 이것을 이르되 文靖(문정)이라 하였네. 鄭圃隱(정포은)의 詩는 天年後에도 일깨움을 발하였으니 내가 銘詞(명사)를 지어 먼 세상에 고하노라.
 
十八 世孫  圭憲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