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당 이원선생 묘갈명(再思堂 李黿先生 墓碣 銘)
재사당 이선생(再思堂 李先生)이 홍치 갑자(弘治 甲子:연산10년,서기1504년)10월24일에 화(禍)를 당한뒤 120년(실제로는 131년이됨)숭정8년 을해(崇禎8년 乙亥:인조13년 서기 1635년)에,증손 대정(曾孫 大鼎)이 양주(楊州)의 시골집으로 나를 찿아왔다.
읍하고 인사를 하고 다가오기에 맞아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 얼굴에 근심하고 슬퍼 하는 빛이있어 깊은 슬픔이 있는것 같았다. 뒤돌아서 가져온 한책자(冊子)를 꺼내어 주면서 이르기를 저의 선조 재사당 공(先祖再思堂公)의 행적(行跡)입니다.
때를 만남이 불행하여 땅위에 뿌린피가 푸르게 엉기어 굳은 한이서린 산소앞에 아직도 비명(碑銘)하나 새겨 세우지 못하였 습니다. 어찌 우리 집안의 3대에 걸친 유한(遺恨)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선생께서 어진 고위고관(高位高官)의 비명(碑銘)을 많이 쓰시고 더우기 절의(節義) 를 논(論)하는 글 쓰기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생각하니 선생께 비명(碑銘)을 받기 위하여 지금까지 기다려온것 같습니다.
만일 선생께서 비명을 써주시지 않는다면 저의 할아버지 행적(行跡)이 후세(後世)에는 마침내 형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감히 굳하여 청하는 바입니다.하고 말을 미처 반도 못하고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 스스로 돌아보건데 내가 적임자가 아님은 알고 있으나 선생의 인품(人品)을 들은지는 이미 오래되었고,의리상(義理上) 도저히 사양하지 못하고서 공손히 받아서 일을 마치였다.
선생의 휘(諱)는 원(黿)이요,자(字)는 낭옹(浪翁)이며,재사당(再思堂)은 그가 스스로 붙인 호(號)이다. 이씨(李氏)는 경주(慶州)에서,나와서 대성(大姓)이 되었고,문충공 제현(文忠公 齊賢)이 고려(高麗)에 정승(政丞)이 되어 덕망(德望)과 업적(業跡)이 크게 빛나고 떨치어서 대대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익재(益齋)선생이라 부르되 그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였다.
5대를 내려와서 관찰사 윤인(觀察使 尹仁)의 대에 이르렀다. 관찰사 위로는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명망(名望)이 드러나서 높이고 받들어 중(重)히 여겼다.관찰사가 현령 공린(縣令 公麟)을 낳았고 현령공(縣令公)이 순천 박팽년(順天 朴彭年)의 따님과 혼인(婚姻)하여 재능(才能)이 뛰어난 아들 팔형제(八兄第)를 낳았으니 선생은 그 셋째시다.
박공(朴公)은 노산군(魯山君:곧 단종을 말함)을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꾀하다가 성삼문 (成三問)들과 함께 죽었으니 곧 세조때(世祖朝)의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다. 처음 현령공(縣令公)이 장가간 첫날밤에,이상한 꿈을 꾸었다.꿈 이야기를 했더니 자라 이야기 듣게되었고 공(公)은 자라들을 풀어서 물에다 띄워 살려 보냈다. 그후 아들을 낳게되자 이 자라들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붙쳤다. 과연 모두가 뛰어나게 훌륭하였고 범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순씨 팔룡에 비기었고 선생을 지목하여 자명(慈明)이라 하였다.
공(公)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를 거쳐, 기유년(己酉年:성종20년 서기148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 하였고 선발(選拔)되어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字)가 되었고 승진(昇進)하여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예(例)에 따라서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겸직(兼職)하고서는 죄를 입어(점필재 김종직의 시호를 정한일로),파직(罷職)되였으나,아무런 거리낌도 없어서 곧 예조좌랑(禮曺佐郞)으로 벼슬을 올려 받았다.
그때 연산주(燕山主)가,미친듯 날뛰고 난폭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데다 간신(奸臣)들이 달래고 부추기고 꼬드겨서 자기 마음 내키는데로 원한을 갚았다. 무오년(戊午年:연산4년 서기1498년)에 성종(成宗)실록을 편찬(編纂)하기 위하여 사국(史局:史官들이 史草를 여는곳)을 열자 비사(秘史: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사실),속에서 필요한것만 빼내어(조의제문 같은것),벌주기 위한 죄안(罪案:범죄 사실을 적은문서)을 짜 놓고서는 당인(黨人:함께 부동이 된사람)이라 지목하여 옳지않은 죄의 이름으로 크게 일을벌려 많은 선비들의 목을 베었다.
이에 작고한 점필재 김문간공(점畢齋 金文簡公(문간은 諡號이고 김종직을 말함)을 사화(史禍)의 으뜸으로 하여, 탁영 김공 일손(濯纓 金公馹孫),한훤 김공 굉필(寒暄 金公 宏弼),매계 조공 위(梅溪 曺公 偉),금남 최공 부(錦南 崔公 簿)의,여러명사(名士)에 미치었고 모두가 죄인됨을 면치 못하였다.
사람을 죽이고도 부족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屍體)에 까지도 참형(斬刑:칼로 목을베는 형벌)을 가하기에 이르니 형벌의 화가 혹독하기 예로부터 일찌기 없었떤 일이다.
선생이 태상시(太常寺:곧 奉常寺)에 있을때,점필재의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여 문충(文忠)이라 추천(推薦)했다 해서,그 죄로 곽산(郭山)으로 귀양을 갔다. 3년만인 경신년(庚申年:연산6년 서기 1500년)에,귀양지를 나주(羅州)로 옮기고 갑자년(甲子年:연산10년 서기1504년)에,무오당인(戊午黨人)에게도 갑자사화(甲子士禍)에,연루시켜 죄를 더하니,선생의 종이 몰래 선생을 업고 도망가려고 꾀하였으나 선생은 왕의 명(命)은 도망할수가 없다고 종을 꾸짖으며 거절하였다.
종이 다시 이장곤(李長坤)의 일을 끌어대며 흐느껴 울며 애써 강권(힘쓸강,勸),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형을 집행하는 자리에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말이 더욱 씩씩 하였다.연산(燕山),이를 듣고서 더욱더 성이나서 형벌의 등급을 올리는 법을써서 현령(縣令)과,그 아들들을 먼 도(道)로 귀양 보냈다.
부인최씨(夫人崔氏)는 석달 앞서서 병으로 궂기셨다. 이에 이르러 선생과 양주(楊州)동쪽 천계리(泉谿里:오늘날 경기도 양주시 회천읍 덕계리), 최씨(崔氏)네,선산(先山0에,합장(合葬),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卽位)하자,맨먼저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어주고 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에 추증(追贈),하였다. 따라서 모든 귀양갔떤 사람들은 특별히 등용(登用)토록 했다.
선생의 천품(天稟)은 의기가 장하고 작은일에 거리낌이 없으며,문장이 뛰어났고 기개(氣槪)가 높고 절조(節操)가 굳으며 언론과,풍채가 탁월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바였다. 젊어서 점필재 로부터 글을 배웠으니 한세상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그 문하(門下)에,있었고 서로 부지런히 배우고 힘써서 사물(事物)의 이치를 궁리(窮理),하였다.
선비들은 선생을 받들어 나라를 잘 다스릴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중히 여겼으나 뜻도 공업(功業)도,미처 이루지 못하고서 일찍 화를 입었다. 평생 책을 즐겨서 널리 여러가지 책을 보았으나 성현(聖賢)들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다.일찌기 금강산을 돌아 다녀보고 널리 전해 내려오는 기록과 전설에 틀리는 것이나 망년된 말들은 막아 버렸고 황당 무계한 말로 여러 사람을 미혹(迷或),시키는 것들은 말로서 꺾어버렸다.
또 바른 이치를 들어 묻고 대답 함으로써 벽을 바라보고 앉아서 좌선 하고있는 중들의 도를 깨우치는 방법이 옳지 않음을 설복 시켯다. 그로 인해서 격물 물격설(格物 物格說)을 지어서 이를 밝히었다. 뒤 따르는 여러 어진 선비들도 서로 보고서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 들엿고 그 이론과 실제가 서로 우연히도 꼭 들어 맞았다고 한다.
문장은 엄숙하고 정결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고,시(詩)는 아주 품격(品格)이,높아서,비록 벼슬에서 내쫓긴 마당에 있어서도,슬프고 마음아파 하며 누굴 원망하는 등의 말이 전혀 없었다. 저술(著述)한 것들은 모두 빠지고 흩어져 없어지고 걷우어 간수 하지를 못하였으나 술지부(述志賦)가,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탁영(濯纓: 金馹孫)은 글에 있어서만은 남을 밀어주고 스스로 양보하는 일이 매우 적었는데 선생의 금강록(金剛錄)을 보고서는 나도 이보다 더 니을수 없다고 말하였다.추강(秋江: 南孝溫)은,선생을 논(論)하여 기상(氣像)이 당당(堂堂)하여 가히 나이어린 대(代)를 이을 아버지를 여윈 자식을 맡길만 하다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양쪽집안의 어짐을 한몸에 모았다고 하였다.
추강(秋江: 南孝溫)이 어찌 구구하게 남을 칭찬한 것이겠는가!? 선생이 굳긴지 이미 백유여년(131년), 비록 지초(芝草)는 사그러지고 혜란(蕙蘭)은 타서 마침내 구렁을 메울 지라도 그 짙은 향기는 더욱 세차게 일어나듯 의(義)로운 행적(行跡)과 영광스러운 이름은 책에쓰여 있고 선생의 사적(事跡)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드러나니 사람들의 입으로 번져 오래 갈수록이 더욱더 성(盛)해만 간다.
그 당시의 간사한 요물들의 모질고 극악 무도한 무거운 죄에대한 벌이 내리니,귀신이 내리는 벌이요, 신(神)이 귀양 보내서 죽게한 것이다. 후세(後世)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었고 남의 명예(名譽)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으니 그 자손들이 어찌 벼슬 아치와 선비들 사이에 나란히 서기를 바라랴! 아아! 세상에 누가 하늘이 없다고 이르겠는가!?
선생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수(洙),하(河),강(江),발(渤),이다. 수(洙)는 군수(郡守)요,4남 3녀를 낳았고 강(江)은 형제를 낳았고,발(渤)은, 증 좌승지(贈 左承旨)요, 2남 4녀를 낳았으며,하(河)는 무후(無後)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많아서 다 쓸수가 없다. 찰방 대유(察訪 大臾)와,판서 시발(判書 時發)은 다 증현손(曾,玄孫)이다. 판서는 재주있는 신하(臣下)로 이름났고 찰방은 벼슬을 던지고 물러나니 명성(名聲)이 높이 판서위에 있었다. 대정(大鼎)은 어려서 부터 늙도록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마침내는 선대(先代)의 뜻을 이루어 영원히 무궁하게 전하여 내려가도록 꾀하여 놨으니 가히 효도 하엿다고 이를 것이다. 이에 명(銘)하니,
아아! 세상에 그 누가 손가락으로 그어 보이며 가르쳐 줌이 없다 하는가? 그 학문은 빛나는 근원(根源)을 가졌기에 나아 갈수록 더욱 만족하지 않는다. 과거 급제하여 책에 이름 오르고 조정(朝廷)에 서자, 어두운 무리 좇음을 부끄러워 하여 스스로 밝음을 펴고자 하니 모두가 물리쳐서 곤하기 이를데 없네.
옥을 진흙속에 던짐과 같으니 누가 그빛을 손으로 가리우랴. 조정(朝廷)에 벼슬하다,귀양길에 나서니 군자(君子)의 행실(行實)이 돋보이기 시작했고여론(與論)들은 죄수되어 수례에 실려가는 사람의 뜻을 기쁘게 한다.
재주와 꾀는 이미 시험을 거쳤으니 외직(外職)에나 내직(內職)에나 모두 마땅 하였고, 모절(곧 儀杖을 말함)은 빛났건만 바른뜻 펴기엔 어려운 때 만났네! 어진이가 어리석은 왕을 만나서 해(害)를 입는괘(卦)니 나래를 드리우고 가만히 쉬며 고난을 참고 굳게 절개 지킴이 이롭다고 하였네.
공(公)의 몸은 깊이 병들었건만, 공(公)의 마음은 아플것 없네. 선비들의공론(公論)도 기울어져 갔건만 초연(超然)히 모르는체 지내었으라. 벼슬도 미련없이 내어던지고 세속(世俗)을 떠나서 깨끗이 사니이는 세속을 벗어난 높은 눈으로 삶을 뚫어 보았다 이를 것이다.
잡티없이 정수(精粹)만 써낸 글들은 빠지고 흩어져 없어졌으나 사람들이 외우고 전하여 왔네. 그 글들 주옥(珠玉)같이 아름다워서 맑은태 길이길이 신기 롭구나.꾸밈없는 풍모(風貌)는 가신지 오래되어 붉은지 푸른지를 그려낼수 없구나.
누군가 훌륭한 역사가(歷史家)가 나오거던 청(請)하거니 문원(文苑)속에 나란히 써넣어서 그 명성(名聲) 오래오래 기리어 주오.
청음 김상헌 찬(淸陰 金尙憲 撰)
1570(선조3)-1652(효종2), 본관은 安東人, 자는숙도(叔度),號는 청험,석실산인(楊州)
1645년 우의정을 역임후 좌의정에 이렀다.
옮긴이 : 야촌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