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왕 현 종(顯宗)

2011. 8. 18. 09:14▣ 시대별 한국왕/시대─조선


■ 1641(인조 19)∼1674(현종 15).
■ 조선 제18대왕.
■ 재위 1659∼1674.
■ 이름은 연.
■ 자는 경직(景直).


1. 가계효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며,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시절에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進封)되었다.

 

2. 치적
현종은 효종의 뒤를 이어서 1659년에 즉위하여 재위 15년 동안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냈다고 볼 수 있지만, 1662년(현종 3)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 1668년 동철활자(銅鐵活字)10여만자를 주조시켰으며,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의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또,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하기도 하였고,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다. 1666년에는 앞서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해 온 하멜(hamel, h.) 등 8명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억류생활 14년간의 이야기인 《화란선제주도난파기 和蘭船濟州島難破記―하멜표류기(漂流記)》와 그 부록인 〈조선국기 朝鮮國記〉를 저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효종대에 염원되어 비밀리에 계획되었던 청나라에 대한 보복정벌인 북벌(北伐)을 국제관계와 국내사정으로 중단하는 대신 군비(軍備)에 힘써서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한편, 이미 망한 명나라에 대한 숭모(崇慕)의 경향이 현저해졌고, 이러한 숭명의 활동은 다음의 숙종 때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 예론의 갈등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라는 예론에 부딪혔다. 즉, 효종의 상을 당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趙氏)의 복제문제가 정쟁화된 것이다.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 家禮》에 의한 사례(四禮)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 五禮儀》에 준칙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었지만 인조의 둘째아들로서 책립되었을 뿐더러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의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이미 입〔服〕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인측에서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주동이 되어 효종이 둘째 아들인만큼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남인측의 윤휴(尹#휴17)와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아무리 둘째 아들이라고 하여도 승통하였으므로 삼년상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무렵 정치계는 1575년(선조 8) 동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치계에 되돌아온 서인과 동인의 계열이기는 하지만 북인·남인으로 분파된 뒤 북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역시 인조 때부터 조정에 복귀한 남인과의 대립이 심상치 않았으나, 그래도 인조·효종 때는 그 관계에 감정적인 대립이 적어서 특히 학문적인 면에서는 서로의 교섭이 원활한 때였다.
그렇지만 예론이라는 당론의 극한적인 대립이 양극화되고 이로 인하여 피차의 논쟁이 장기화되자, 감정이 격화되어 서인측의 주장에 따라서 기년복이 조정에서 일단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이른바 예론이 지방으로 번져 그 시비가 더욱 커지자, 1666년 조정에서 다시 기년복의 결정을 재확인하면서 이에 대하여 항의를 하게 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할 것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74년 왕대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재론되면서 예론이 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즉, 서인측의 대공설(9개월복)과 남인측의 기년설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뒤 이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착되면서 서인측의 주장이 좌절되었으므로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로써 서인측이 많이 배척되었다.
이 문제는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되어 1679년(숙종 5) 20년간에 걸친 기해복제문제의 재론을 엄금하는 엄명이 있어 형식적으로는 조정에서 다시 거론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많은 시비가 내면적으로 계속되었다.

 

4. 예론의 후유증
이 예론은 예의 본질론(本質論―不可變性)에 입각한 서인측의 예관념(禮觀念)과 행용론(行用論―可變性)에 치중한 남인측의 예관념의 학문적인 해석이 당론으로 발전하면서 당쟁의 비극으로 까지 파급된 것이다.
이렇게 현종대는 예론의 시비로 일관되다시피 되었고, 당론의 쟁투로 지새웠기 때문에 현종이 죽은 뒤에 찬수된 《현종실록》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부터 편찬이 착수되었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숙종의 독촉을 받고 1677년에 겨우 완성된 졸속의 실록이었고, 아울러 그 편찬에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서 득세한 남인측이 많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서인측으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1680년 경신대출척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뒤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여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 顯宗改修實錄》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실록 가운데 수정실록(修正實錄)이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의 경우가 있고, 개수실록이 이 《현종실록》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모두 당쟁의 결과 부득이 개수 또는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의 성격과 당시의 당쟁상황을 짐작할만하다.
시호는 소휴(昭休), 능호는 숭릉(崇陵:경기도 구리시 소재)으로 비 명성왕후와 같이 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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