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2. 16:29ㆍ▣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
가문을 빛낸 선조들
<한자>
字庸伯號는瓢公先生이니少는文章하고事孝悌之道하며行賢聖之禮하고年十六에遊學三國하니
時人이稱之曰大賢也라하다開國建都初에以佐命功臣으로爲太輔太師大司徒하고命遣馬韓하니
其人이責以事大之禮어늘先生曰我國이自二聖肇興으로人事修而天時和하고倉庫實而人民讓하야
辰韓弁韓樂浪倭人이罔不畏懷而吾王이謙虛하야使臣이修聘하니可謂過於禮라하야
馬韓王左右諫甚하다時에三韓이尙戰爭호대先生이獨行仁義하고不務威力하며以忠事君하니
時人이謂賢相이러라官至大匡承博士農令都尉令尙書事左右內史侍中太師公하고太宗丙辰에改太史令하다
諡는文成公이라
<한글>
자용백호는공선생이니소는문장하고사효제지도하며행현성지례하고년십육에유학삼국하니
시인이칭지왈대현야라하다개국건도초에이좌명공신으로위태보태사대사도하고명견마한하니
기인이책이사대지례어늘선생왈아국이자이성조흥으로인사수이천시화하고창고실이인민양하야
진한변한낙랑왜인이망불외회이오왕이겸허하야사신이수빙하니가위과어예라하야
마한왕좌우간심하다시에삼한이상전쟁호대선생이독행인의하고불무위력하며이충사군하니
시인이위현상이러라관지대광승박사농령도위령상서사좌우내사시중태사공하고태종병진에개태사령하다
시는문성공이라
◑
文祥(문상)
<한자>
字는善長이니容胃偉麗하야有貴价風彩하고性寬厚하며自少로文章兼武藝하다
婆婆王祖에登官하야命中尉博士令하고累遷大農承左內史하야
至大輔上等定國功臣左令承眞骨大阿飡하고號는松軒先生이니
太宗武烈王이思其先生之德行文章하야贈左內史侍中太尉令尙書事하고
諡는文莊法興王이요贈鷄林侯하다
<한글>
자는선장이니용위위려하야유귀개풍채하고성관후하며자소로문장겸무예하다
파파왕조에등관하야명중위박사령하고누천대농승좌내사하야
지대보상등정국공신좌령승진골대아찬하고호는송헌선생이니
태종무열왕이사기선생지덕행문장하야증좌내사시중태위령상성사하고
시는문장법흥왕이요증계림후하다
◑起貞(기정)
<한자>
字는耶邦이니性重和裕하고智勇이過人하며乳膽略志節하고讀九經하야文才秀出하다
奈解王朝에登官太尉門下하고累拜知奏事政忠事堂直太角干하다
助賁王朝에爲千牛惇王伐甘文國公이고以謀士將軍으로擧老將軍하고
其伐沾解王時에伐沙伐國하고公이與于老伐之하니國人이謂之忠義之將이라하고
諸國이大懼之러라官至上等大輔功臣輔國大將軍千牛頭大阿飡上柱國하고法興王時에贈諡忠宣公하다
<한글>
자는야방이니성중화유하고지용이과인하며유담략지절하고독구경하야문재수출하다
내해왕조에등관태위문하하고누배지주사정충사당직태각간하다
조분왕조에위천우돈왕벌감문국공이고이모사장군으로거노장군하고
기벌점해왕시에벌사벌국하고공이여구노벌지하니국인이위지충의지장이라하고
제국이대구지러라관지상등대보공신보국대장군천우두 대아찬상주국하고법흥왕시에증시충선공하다
◑
成立(성립)
<한자>
字는景行이니性剛直不撓하고有鑑智하며文章之才하니儒禮王이以女妻之하다登官하야
執事에果忠直하니遷知奏事侍郞하고爲西幾停都摠管正海軍하니
今密陽이라進爲左內史通政事大角干千牛惇大輔上等大阿飡하고至基臨王二曹하야贊賢相事하다
<한글>
자는경행이니성강직불요하고유감지하며문장지재하니유례왕이이녀처지하다등관하야
집사에과충직하니천지주사시랑하고위서기정도총관정해군하니
금밀양이라진위좌내사통정사대각간천우돈대보상등대아찬하고지기임왕이조하야찬현상사하다
◑
曙 (서)
<한자>
字는孟己니自少로多讀書有文行하고兼孝悌之道하다
紀臨王朝에登爲南幾停都摠管正海軍하니
今蔚州라累遷阿干大輔上等農承領忠恭正事堂大阿飡上柱國하다
<한글>
자는맹기니자소로다독서유문행하고겸효제지도하다
기임왕조에등위남기정도총관정해군하니
금울주라누천아간대보상등농승령충공정사당대아찬상주국하다
◑
啓 (계훤)
<한자>
少能習學하야有文章하다基臨王朝에登官하야至奏事하고遷北幾停都督하니
堂時에謂之幾停也러라時에百濟相侵伐하니時에公이都督으로援兵一戰하야
大破百濟하고以戰功으로官至輔國大將軍上等功臣角干阿찬上柱國하고
脫海王兩朝에入仕하니載明相史하다
<한글>
소능습학하야유문장하다기임왕조에등관하야지주사하고천북기정도독하니
당시에위지기정야러라시에백제상침벌하니시에공이도독으로원병일전하야
대파백제하고이전공으로관지보국대장군상등공신각간아찬상주국하고
탈해왕양조에입사하니재명상사하다
◑
仁興(인흥)
<한자>
字는和行이니有文章德行호대不仕하고初隱於山林間하야好鍾樹求賢士하며
修道德行하니學者-稱號道千先生하다智贈王이聞其賢하고爲用之四年에
先生이以內史博士令奏事로遷協律都尉하야上言曰我始祖以來로國號未定하야
或稱斯羅하고或稱新羅하니新者는德業日新이요羅者는綱羅四方之義則爲國號-宜矣니이다
臣이又觀自古로有國家者는皆稱帝稱王이로대自我立國으로至今二十歲에但稱方言하고
未定尊號하니今臣等이定議謹上하나이다하니上이善從之하고因以國號新羅하고諡法始此하다
公이進爲太尉領尙書몽宰通政事太史太傅大史令하다明年에諫制衰服하나
法興王이臨夢에以太子로謂公曰吾死之後에太子幼하니願思周公之事라하고命太子師傅하다
法興王이入之에公攝行王事하야始制百官公服禮하다時에三韓諸國이
聞之大懼曰君子之國也라하다公이輔國三十餘年에賢相明政하고年老退仕하야
謂其弟子曰孝悌忠信云과三綱五倫法을筆之書하다文集二十卷이傳家焉하고
先生이卒하니享年이七十三이라法興二十三年에贈太史令光祿大夫平林侯하고
諡文烈公하다太宗武烈王이追封章惠王하고讚曰其忠其忠이여百歲忠이요
仁興仁興이여萬歲仁興이라하다
<한글>
자는화행이니유문장덕행호대불사하고초은어산림간하야호종수구현사하며
수도덕행하니학자-칭호도천선생하다지증왕이문기현하고위용지사년에
선생이 이내사박사령주사로천협율도위하야사언왈아시조이래로국호미정하야
혹칭사나하고혹칭신라하니신자는덕업일신이요나자는강나사방지의즉위국호-의의니이다
신이우관자고로유국가자는개칭제칭왕이로대자아립국으로지금이십세에단칭방언하고
미정존호하니금신등이정의근상하나이다하니상이선종지하고인이국호신라하고시법시차하다
공이진위태위령상서몽재통정사태사태부대사령하다명년에간제쇠복하나
법흥왕이임몽에이태자로위공왈오사지후에태자유하니원사주공지사라하고명태자사부하다
법흥왕이입지에공섭행왕사하야시제백관공복예하다시에삼한제국이
문지대구왈군자지국야라하다공이보국삼십여년에현상명정하고년로퇴사하야
위기제자왈효제충신운과삼강오륜법을필지서하다문집이십권이전가언하고
선생이졸하니향년이칠십삼이라법흥이십삼년에증태사령광록대부평림후하고
시문열공하다태종무열왕이추봉장혜왕하고찬왈기충기충이여백세충이요
인흥인흥이여만세인흥이라하다
◑
善禎(선정)
<한자>
亦有才識하다眞興王朝에登官하야眞興王平王三朝에爲戰功하고
公이眞興王朝에爲郞中하니時에高句麗兵이犯境이어늘王이命之하야
爲司馬將軍하고與金恭天等八將으로大破高句麗하고又伐伽倻國하며
伐峰금旗縣懸穴산助川四城得之하야累立戰功하다
眞平王時에百濟-大發兵來어늘公이命爲謨士摠兵將하야
與大將軍乾品等으로大破之하야
官至兵部令內史門下平章事大輔功臣太史太輔太中大夫上柱國하다
<한글>
역유재식하다진흥왕조에등관하야진흥왕평왕삼조에위전공하고
공이진흥왕조에위랑중하니시에고구려병이범경이어늘왕이명지하야
위사마장군하고여금공천등팔장으로대파고구려하고우발가야국하며
벌봉금기현현혈산조천사성득지하야누립전공하다
진평왕시에백제-대발병래어늘공이명위모사총병장하야
여대장군건품등으로대파지하야
관지병부령내사문하평장사대보공신태사태보태중대부상주국하다
◑
友榮(우영)
<한자>
字는浩眞이니少讀書文章하다眞德王二年癸卯에命爲遣使하야
入唐請兵하야共伐百濟하니時에唐太宗이聞其文章하고設國子監試하니
公이遂爲及第하야至翰林學士하고九月에特賜請兵하다
武烈王朝에又得戰功하고文武王朝에爲謨率師하야與唐兵으로伐高句麗하다
官至協律都尉衛杜置功臣內史門下平章事守太尉尙書左僕射大輔阿찬上柱國하고
贈太師光祿大夫大尉諡文貞公하다
<한글>
자는호진이니소독서문장하다진덕왕이년계묘에명위견사하야
입당청병하야공벌백제하니시에당태종이문기문장하고설국자갑시하니
공이수위급제하야지한림학사하고구월에특사청병하다
무열왕조에우득전공하고문무왕조에위모솔사하야여당병으로벌고구려하다
관지협율도위위두치공신내사문하평장사수태위상서좌복사대보아찬상주국하고
증태사광록대부대위시문정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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頊 (욱)
<한자>
字는定世號는明巖先生이니少能文學하고以孝父母하야
聖德王이聞其孝爲忠孝兼全하고特爲翰林侍郞中書舍人하다
孝成王潛邸時에爲忠信功臣하고景德王朝에爲協謨輔理佐命功臣하고
官至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大角干都尉令尙書事侍中判御史臺上柱國하고諡忠定公이라
<한글>
자는정세호는명암선생이니소능문학학이효부모하야
성덕왕이문기효위충효겸전하고특위한림시랑중서사인하다
효성왕잠저시에위충신공신하고경덕왕조에위협모보리좌명공신하고
관지수태위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대각간도위령상서사시중판어사대상주국하고시충정공이라
◑
陶(도)
<한자>
字는常天니有文章하다憲德王七年乙未에登第하고
興德王元年에重試及第하야官至翰林院太學士承宣官, 左諫議大夫, 守太尉平章事하다
僖康王元年에立協律, 謨衛社致理功臣都令, 侍通政尙書事하고
諡는文肅公이요號는茅溪先生이니出賢相史하다
<한글>
자는상천니유문장하다헌덕왕칠년을미에등제하고
흥덕왕원년에중시급제하야관지한림원태학사승선관, 좌간의대부, 수태위평장사하다
희강왕원년에입협률, 모위사치리공신도위령,시통정상서사하고
시는문숙공이요호는모계선생이니출현상사하다
◑
嗣彦(사언)
<한자>
字는重仁이니有文章하다僖康王朝元年에登第하야以中書舍人으로爲金明所害하니
人皆痛之러라神武王이卽位初에公이與崔文昌으로爲及第하야眞翰林院學士하고
拜左諫議大夫하야命爲太子師傳하야委以翰林之任하니一時貴遊者이師事하고
至門下侍郞, 太史令, 銀靑光祿大夫하야復令參預政事하고
諡文義公이요號는松溪先生이라.
<한글>
자는중인이니유문장하다희강왕조원년에등제하야이중서사인으로위금명소해하니
인개통지러라신무왕이즉위초에공이여최문창으로위급제하야진한림원학사하고
배좌간의대부하야명위태자사전하야위이한림지임하니일시귀유자이사사하고
지문하시랑, 태사령, 은청광록대부하야복령참예정사하고
시문의공이요호는송계선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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禧斗(희두)
<한자>
有文章하다憲安王朝에與仲弟辰斗로入中原하야制科爲翰林學士하고
及東還三年에景文王二年壬午에別設國子監試하고公兄弟가同登及第하야
官至中書尙史, 平章事, 門下侍中上柱國하고贈金紫光祿大夫하다
<한글>
유문장하다헌안왕조에여중제진두로입중원하야제과위한림학사하고
급동환삼년에경문왕이년임오에별설국자감시하고공형제가동등급제하야
관지중서상사, 평장사, 문하시중상주국하고증금자광록대부하다
★신라 47대 헌안왕857-861시대급제, 48대 경문왕시대(861-875) 급제)
◑
誡 (계)
<한자>
字는渭니有才識精敏하고善隸書하니憲康王朝에登科하야
官至翰林院太學士, 中書諫議大夫, 平章事, 內史尙書領, 都尉復令參預政事하고
年老에退居臨海間하야 學士徒衆하니
勸學訓導하고植木樹하며養魚放海하야終其身하고
號는法軒이라正康王朝時에賜銀紫光祿大夫侍中領하고
諡는文懿公이니筆蹟文集二十卷과李氏世譜文集三十卷이傳家焉하다
<한글>
자는위니유재식정민하고선예서하니헌강왕조에등과하야
관지한림원태학사, 중서간의대부, 평장사, 내사상서령, 도위복령참예정사하고
년로에퇴거임해간하야 학사도중하니
권학훈도하고식목수하며양어방해하야종기신하고
호는법헌이라정강왕조시에사은자광록대부시중령하고
시는문의공이니필적문집이십권과이씨세보문집삼십권이전가언하다
★49대 헌강왕(875-886)시대 급제,50대 정강왕(886-897)시대 추증)
◑이거명(李居明):
소판(蘇判)이라는관직은신라시대골품제도(骨品制度)의성진골품(聖眞骨品)만이 친거되었으니,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왕인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때까지는 진골계(眞骨系)에서
분적(分籍)하여 명분 호족(豪族)의 긍지로서 번성하여 갔음을 보이고 있다.
◑이금서(李金書)936에서 942에 始仕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고려건국936년, 慶州李氏戊午大同譜序3世
◑이총섬(李寵暹):
998(목종 1년) 오인유(吳仁裕),남궁원청(南宮元淸),이윤관(李允寬)등과, 진(秦)나라에 청원하여 고려에도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고, 국자감(國子監) 시험제도설립(試驗制度設立)을 청원하여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립함으써 면학의열성을 고취시켰다.
◑이현복(李玄福):
국자감(國子監)에서 부(賦),시(詩),경의(經儀) 등을 시강(試講)하였고 문하성 (文下省)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좌복사(左僕射)를 역임하였다.
◑이주좌(李周佐):
?~1040(정종6년) 고려의 대신.동경 유수(東京留守) 이성공(李成功)에의해 발탁 되어 국학(國學)에서
수학(修學),목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상주목(尙州牧)의 기실참군사 (記室參軍事)를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올랐다.1016년(현종7년) 감찰 사헌(監察司憲) 시어사(侍御史) 기거사인(起居舍人)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거쳐, 1030년(현종21년)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1033년(덕종2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이듬해 국자좨주 좌간의대부가 되고, 형부상서 판어사대사에 이르러 죽었다.
사공 상서 우복사(司空尙書右僕射)에 추증(追贈).
◑이녹천(李錄千):
1135년(인종13년)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서경(西京)에 남아 있는 조광(趙匡)등의 무리을 토벌하였다.
◑이 진(李 진):
1244(고종 31년)~1321(충숙왕 8년) 고려의 문신. 초명은 방연(方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
시호는 문정(文定),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 제현(齊賢)의 아버지. 문과(文科)에 급제,
광주 사록(廣州司錄)이 되고, 뒤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기용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을 때 둘째로 뽑혔으며,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군부 총랑(軍簿 摠郞)에 전임 1297년(충렬왕 23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다.
그뒤 대사성·밀직 승지, 1303년(충렬왕 29년)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1307년(충렬왕33년)판위위시사
권수밀직부사가 되어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됨으로써 정당문학(政堂文學)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림학사·시우산기상시, 이어 좌승지·비서윤·지병조사 학사가 되었으며,
뒤에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軍)에 봉해졌으며, 1315년(충숙왕 2년)
과거(科擧)를 맡아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이제현(李齊賢):
1287년(충렬왕13년)~1367년(공민왕16년). 고려의 문신 학자 시인.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 는익재(益齋) 실재(實齋)역옹(轢翁),시호는문충(文忠),검교정승(檢校政丞)
진(진)의 아들.백이정(白이正)의 문인. 1301년(충렬왕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이어 (文科)에 급제,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등을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지낸후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2년) 선부산랑(選部散郞),다음해
전교시승(典校侍丞) 삼사판관(三司判官)등을 역임,1312년 서해도 안렴사(西海道安廉使)로 나갔다가
성균 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豊儲監斗斛)을 역임, 1314년(충숙왕1년)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 이 해 원나라에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券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趙孟膚)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 다음해
선부 전서(選部典書)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上王)의 생일을 축하했다.
1319년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고,
이 해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부당함을 그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다음해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지고, 1336년 삼중대광 영예 문관사에 올랐다.
1339년 심왕(瀋王) 고(暠)가 모역(謀逆)하다 실패하자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 원사(元使) 두린(頭麟)등이 왕을 잡아가자,
이때 연경에 가 사실을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 시골에 은거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4년) 충목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 권단정동성사로 발탁,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에 오르고, 1353년사직했다가 다음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에 호종(扈從),
이해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편찬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조맹부의 서체(書體)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유행시켰다.「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17수의 고려의 민간 가요를 한시(漢詩)칠언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오늘날 고려가요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민왕묘정(廟庭)에배향(配享), 경주(慶州)의 귀강서원(龜岡書院),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
◑이수림(李壽林):
?~1369년(공민왕18년) 고려의 문신.제현(齊賢)의 손자.전리 총랑(典理摠郞) 달존(達尊)의 아들.1354년(공민왕3년)
군부판서(軍簿判書),뒤에 이부판서(吏部判書)를역임, 1356년 참지정사(參知政事)이천선 (李千善)과 함께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3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밀직 상의(密直商議) 홍순(洪淳)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백관(百官) 및
기로(耆老)의 글을 어사대(御史臺)에 바쳤으며, 1369년(공민왕18년)노은(盧誾)의 일파로서 사형을 당했다.
◑이양식(李陽植):
고려(高麗)때 문하성(門下省)의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左僕射)를 엮임하였고,경주에서 우계(羽溪)로
이주한 후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하였다.
◑이자영(李自英):
고려 알평(謁平)의 51세(世)요. 소판공(蘇判公)의 16세인데,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공을 세워 진위군(振威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본관을 진위(振威)로 하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되었다.
◑이 핵(李 핵):
자(字)는 만리(萬里),호(號)는 열헌(悅軒), 초휘(初諱)는 타(駝)로서 부인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인정(仁挺), 진(진),
세기(世基) 등 아들 삼형제에게 서책(書冊)을 직접 교육하여 모두 수석 장원(首席壯元)이 되니 이웃 사람은
팔자 좋은 열헌(悅軒)이라 부러워하니,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의 묵헌(默軒) 민지선생(閔漬先生)은
「꽃송이 같은 세아들 다섯 손자가 모두 장원에 급제 하였더니 세상사람들은 이태백을 닮은 재주라고 칭찬하였으며,
열헌(悅軒)공은 평소에 적선(積善)을 하여 온세상에 알려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혼자서 매년 경사(慶事)를 보는구나.」
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이 전(李 筌):
자(字)는 국서(國瑞), 은열와(恩烈王)의 50대손(代孫)이요.,소판공(蘇判公:李居明)의 15세손이며 선경(善景)의
넷째아들로,고려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덕은군(德恩君)에 봉하자 후손들이 덕은(德恩)을 본관으로
삼아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한 덕은이씨(德恩李氏)의 시조(始祖)이다.
◑이숙진(李淑眞):
1270년(원종 11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낭장(郎將) 윤길보(尹吉甫)와 몽고군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이인정(李仁挺):
호(號)는 성암(誠庵) 열헌공(悅軒公)의 장남으로 문과에 수석 장원(首席壯元)하여 광주 판관(廣州判官)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에 이르렀다.
◑이세기(李世基):
호(號)는 송암(松巖),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1279년(충렬왕5년) 성균시(成均試)에서 수석 장원하고
1280년(충렬6년) 친시(親試)에서 둘째형인 동암(東庵)과 함께 수석장원하니,충렬왕(忠烈王)은 크게 칭찬하여
황폐(黃폐)를 하사하였으며 정승(政丞)이었던 민지선생(閔漬先生)과 찬성사(贊成事) 조간(趙簡)선생은
시문(詩文)을 보내어 경하(慶賀)하였다. 벼설은 비서성 비서교서(秘書省秘書校書)를 거쳐서
검교정승(檢校政丞) 등을 역임하였다.
◑이임간(李林幹):
고려 때 상서병부 판서(尙書兵部判書)지냈다. 그가 은열왕(恩烈王)의 51세손(世孫)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장수(長水)의 옛명칭)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장수(長水)를 본관으로 하여
경주 이씨(經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이 천(李 천):
1274년(원종 15년)~1349년(충정왕 1년) 고려의 문신. 1299년(충렬왕 25년) 국자시(國子試)에 수석합격,
충숙왕 때 우사보(右思補)가 되고,1343년(충혜왕 복위 4)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에 승진, 이듬해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했다. 이 해 충목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1345년(충목왕 1년)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낸뒤,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승고(李升高):시호(諡號)는 공의(恭懿), 고려 때이조 참판(吏曹參板)을 지냈다.
◑이득윤(李得胤):
1553년(명종 8년)~1630년(인조 8년) 조선의 학자.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제현(齊賢)의 후손.
1588년(선조 21년) 진사(進士)가 되고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修學),역학(易學)에 뛰어나 당시의
대가 박지화(朴枝華)를 찾아가 역학을 토론, 크게 이름을 떨쳤다.
1597년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심, 1597년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이어 형조 좌랑(形曹佐郞)· 의성 현령(義城縣令)을 지냈다.
광해군 때는 혼란한 정계를 피해 고향에 머물러 김장생(金長生)과 서환을 교환하여 태극도(太極圖)와 역학을 토론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선공감정(繕工監正)이 되고, 이듬해 괴산 군수(槐山郡守)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음악에도 뜻을두어 1620년(광해군 12)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편술(編述), 금도(琴道)를 후세에 계승시켰다.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청안(淸安)의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
◑이수일(李守一):
1554년(명종 9년)~1632년(인조 10년) 조선의 무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忠武),
1583년(선조 16년)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訓鍊院)의 벼슬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장기 현감(長기縣監)으로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醴泉)용궁(龍宮)에서 패전,
이해 밀양 부사(密陽府使)에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왜적 격퇴에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회령 부사(會寧府使)· 나주 목사(羅州牧使)를거쳐1596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성주 목사(星州牧使)로서
명령을 어겨 결장 종군(決杖從軍)되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세번 역임하면서 변방을 침범하는야인(野人)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현(鞍峴)에서 이괄군을 대파,
서울을 수복케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해진 뒤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좌의정에 추증(追贈).
◑이항복(李恒福):
1556년(명종 11년)~1618년(광해군 10년). 조선의 문신,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고려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제현(齊賢)의 후손,
참찬(參贊)의 아들. 1580년(선조 13년) 알선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거쳐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거처 전적(典籍)·
정언(正言)· 수찬(修撰)· 이조정랑(吏曹正郞)등을 역임했다.
1589년 예조 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모반사건을 다스렸다.
응교(應敎)· 사인(舍人)·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590년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고,
정여립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3등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데 태만했다는 죄로 파직되었으나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王妃)를 개성(開城)으로 호위(扈衛), 이어 두 왕자를 평양으로 호위하고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했다.
그 동안 이조 참판(吏曹參板)으로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진 후 형조 판서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했고,
다시 대사헌을 거쳐 병조 판서가 되자 이덕형(李德馨)과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안으로는
전국에 근왕(勤王)의 군사를 모집했다. 이어서 병조판서로 직제학(直提學)을 겸하고
또한 지경연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좌빈객(左賓客)등을 겸직했다.
이해 명나라의 지원군을 선도(先導)하여 맞아들였으며, 이듬해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1594년 병조판서로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 다음해 이조 판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우참찬(右參贊)등을
역임하였고,1597년 병조판서에 재임중 신병으로 사임,임진왜란 이래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로서병권(兵權)을 잡고 크게 활약했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 다음해 우의정에 전임되어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都體察使)등을 겸직, 이어 영의정에 승진하여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進封),
이 해 성혼(成渾)을 구하려다가 정철의 일당이라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봉해지고 1608년(광해군 즉위) 좌의정에 재임, 도체찰사를 겸한 후
1611년(광해군 3년) 우의정을 지냈으나 1613년 역괴(逆魁)를 천거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사직소(辭職疎)를
올리고 은거(隱居), 1617년 폐모(廢母)의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관작이 삭탈(削奪)되고
이듬해 북청(북청)에 유배되어 배소(배소)에서 죽었다.
임진왜란증 난의 뒷수습을 하는 데 힘쓴 명신으로서 당쟁(黨爭)속에서도 붕당(朋黨)에 가담하지 않고
그 조정(調停)에 힘썼다. 죽은 해에 복관(復官)되고 청백리(淸白里)에 녹선(錄選)되었다.
포천(抱川)의 화산서원(花山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祭享).
◑이광윤(李光胤):1564년(명종 19년)~?
조선의 문신. 자는 극휴(克休),호는 양서(讓西) 제현(齊賢)의 후손 1585년(선조 18년) 진사(進士)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초서(草書)로써 이름을 떨쳤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
◑이정원(李挺元):1567년(명종 22년)~1623년(인조 1년)
조선의 문신.자는 중인(仲仁) 호는 후포(後浦) 충량(忠良)의 아들.1603년(선조 36년)진사(進士)가 되고,
1610년(광해군 2년) 참봉(參奉)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사서(司書) 정언(正言)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거쳐 1614년 군기시정(軍器侍正) 필선(弼善)이 되었다.
1616년에 검상(檢詳),1619년 응교(應敎) 전한(典翰), 이듬해 대사간을 역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심복(心腹)으로 정치를 어지럽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주살(誅殺)되었다.
◑이 홀 (李 흘) : 1568년(선조 1년) ~ 1630년(인조 24년)
조선의 문신.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 오계(梧溪), 시호는 충장(忠章), 부사과(副司果) 천일(天一)의 아들.
1591년(선조 2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학유(學諭)가 되고 임진왜란 때는 가주서(假注書)로
왕비(王妃)를 해주(海州)에 호종(扈從), 1594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指平) · 문학(文學) · 백천군수(白川郡守)를 거쳐
공조 · 예조 · 형조의 · 정랑(正郞)을 지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후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江華)로 왕을 호종했다.
1629년 사은사(謝恩使)로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과 함께 선편(船便)으로 명나라에 가다가 홀로 살아
하표(賀表)와 변무주문(辯誣奏文)을 명나라에 바치고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이시발(李時發):1569년(선조 2년) ~ 1626년(인조 4년)
조선의 문신.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 후영어은(後潁漁隱), 시호는 충익(忠翼), 진사(進士)대건(大建)의 아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 1589년(선조 22년)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전적(典籍) · 정언(正言)등을 지냈다.
159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재직중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의
임무를 수행했고, 이듬해 병조병랑(兵曹兵郞)에승진,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했다.
1596년 이몽학(李夢學)의 난때 토벌에 전공을 세우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승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어 명나라 원병에 대한 군량미 보급을 맡았다.
1602년 경상도 관찰사,1604년 형조참판(形曹參判),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탁남(李擢男):1572년(선조 5년) ~ 1645년(인조 23년)
조선의문신.자는 근숙(根叔), 시호는 의정(毅靖), 좌참찬(左參贊)몽량(夢亮)의 손자(孫子)이다.
160년(선조 33년) 음보(蔭補)로 청단도 찰방(靑丹道 察訪)이 되고, 전설사 별제(典設司 別提)
사복시 주부(司僕侍 主簿)를 역임했다. 덕산 현감(德山 懸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27년(인조 5년) 횡성 현감(橫城 縣監)으로 있을 때 이인거(李仁居)가 난을 일으키자 원주 목사(原州 牧使)
홍보(洪寶)와 함께 싸워 이인거을 체포,서울로 압송했다.
그 공으로 소무공신(昭武功臣) 2등이 되어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호조판서에 추증(追贈).
◑이경하(李擎廈):1573년(선조 6년) ~ 1641년(인조 19년)
조선의 학자. 자는 근임(謹任), 참봉(參奉) 봉남(鳳男)의 아들.이항복(李恒福) 의 문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館)을 거쳐 1605년(선조 38년) 우봉 현령(牛峯縣令)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즉위 후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은퇴했다.
◑이 익(李 瀷) :1579년(선조 12년) ~ 1641(인조 2년)
조선의 문신.자는 형여(炯如),호는 간옹(艮翁),옥포(玉浦),판관(判官) 유일(惟一)의 아들.
1612년(광해군 4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검열(檢閱)이 되고,
1615년 전적(典籍)에 올라 사서(司書) 정언(正言)등을 엮임,1618년(광해군 10년)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다.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후 사예(司藝)로 기용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전한(典翰)에 추증(追贈).
◑이시성(李時省):1598년(선조 31년)~1668년(현종 9년)
조선의 문신 자는 자삼(子三),호는 기봉(驥峰),항복(恒福)의 종손(從孫).어려서 항복에게 글을 배운 뒤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고,1650년(효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화양 부사(淮陽府使)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1667년 가승지(假承旨)에 발탁되었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기남(李箕男):1598년(선조 31년)~1680(숙종 6년)
선의 문신.자는 정숙(靜叔),영의정 항복(恒福)의 아들.1630년(인조 8년) 진사(進士)가 되고,어머니의 절행(節行)으로
정경세(鄭經世)에게 천거되어 벼슬에 나갔다.북방야인(野人)이 침범하자 자진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扈從),난이 평정된 후 풍천부사(豊川府使)를 지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정헌대부(正憲大夫) 올랐다.
◑이충급(李忠伋):?~1627년(인조 5년)
조선의 무장(武將).자는 중사(仲思),용천(龍川) 출신.무과(武科)에급제,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에 활약한
공으로 주부(主簿)가 되고, 1624년(인조 2년) 용골성(龍骨城)을 축조할 때 도청(都廳)으로 공을 세워
청수 만호(靑水萬戶)가 되었다.
19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성(義州城)의 동문장(東門將)으로 전사한 부윤(府尹) 이완항(李完巷)을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철편(鐵鞭)을 가지고 적진에 돌입,많은 적을 살해하고 전사했다.
판결사(判決事)에 추증(追贈),의주의 귀암사(龜巖祠)에 제향(祭享).
◑이 완(李浣) :1602년(선조 35년)~1674년(현종 15년)
조선의 문신.자는 징지(澄之),호는 매죽헌(梅竹軒),시호는 정익(貞翼),판서 수일(守一)의 아들.
1624년(인조 2년)무과에 급제,1627년 영유 현령(영유현령)을 거쳐 1629년 상원 군수(祥原郡守),이듬해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지내고 1631년 하의 별장(別將)으로 출전,정방산성(正方山城)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1638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43년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하고,효종이 송시열(宋時烈)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하자
1652년(효종 3년)어영대장(御營大將)에 발탁,1653년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어 신무지의 제조,
성곽의 개수 신축 등으로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1655년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공조판서를 지내고 다음해 훈련 대장에 재임 되었으나,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별세로 북벌계획이 중지되었으며,1664년 공조판서 1668년 훈련대장에 각각 재임,다음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은퇴했다가 1671년 수어사(守禦使)에 등용되고,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작품으로 시조 2수가 전한다.
◑이시술(李時術):1606년(선조 39년)~1671년(현종 12년)
조선의 문신. 자는 사강(士强),좌의정 항복(恒福)의 손자, 부사(府使)정남(井男)의 아들. 1630년(인조 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천거로 세자익위 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등을 지내고 1652년(효종 3년) 정랑(正郞)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헌납(獻納) 수찬(修撰) 보덕(輔德) 사간(司諫)등을 역임했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장례때 국장도감 도청(國裝都監都廳)이 되었으며 이해 부교리(副校理) 선천부사(宣川府使)
교리를 지내고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있을 때 관하 백성이 청나라에 불법 월경한 사건으로청나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했다.
1655년(현종 6년) 형조참의(刑曺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이듬해 이조참의, 1669년 병조참판(兵曺參判),다음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유태(李惟泰):1607년(선조 40년)~1684년(숙종 10년)
조선의 문신 학자, 자는 태지(泰之),호는 초려(草慮),시호는 문경(文敬),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 대방(大邦)의 손자.
장형광(張顯光)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의 문인.유일(遺逸)로서 천거를 받아 인조때 세자 사부(世子師傅)를 지내고,
1660년(현종 1년) 호군(護軍)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1663년 균전사(均田使) 동부승지(同副承旨),1669년 찬선(贊善),이듬해 다시 이조참의를 지내고 효종 즉위 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가 되참여했다. 3사(司)가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자
장문(長文)의 상소로써 김상헌의 충의 도덕(忠義道德)을 높이 찬양하여 그 처벌을 극력 반대했다.
1675년(숙종 1년)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윤휴(尹휴)등 남인(南人)의 배척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5년 뒤에 방환되었다.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처음에는 송시열과 의견을 같이했으나,
뒤에는 학문상 의견의 대립으로 절교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제향(祭享).
◑이 억 (李檍):1615년(광해군 7년)~1636년(인조 14년)
조선의 무관 자는 여량(汝樑),현감(懸監) 석립(碩立)의 아들.힘이 장사로 승마와 활쏘기에 능했고 병법에 밝았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휘하에 들어가 광조(廣州)의 쌍령(雙嶺)에서
적을 맞아 분전 끝에 전사했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이경휘(李慶徽):1617(광해군 9년)~1669년(현종 10년)
조선의 문신 자는 군미(君美),호는 묵호(默好) 춘전거사(春田居士),시호는 익헌(翼憲) 형조판서 시발(時發)의 아들.
1633년(인조 11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44년(인조2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뒤 이듬해 검열(檢閱)을 거쳐 1647년 지평(持平)에 올랐다.
1653년(효종 4년) 행홍문관수찬(行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역임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 헌납(獻納)이 되었다.
1665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대사성을 겸임, 1669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경억(李慶億):1620(광해군 12년)~1673년(현종 14년)
조선의 문신.자는 석이(錫爾),호는 화곡(華谷),시호는 문익(文翼),시발(時發)의 아들.1644년(인조 2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1653년 (효종 4년) 순안어사(巡按御史)가 되어 영남지방을 순찰했다.
이듬해 정언( 正言) 수찬(修撰)을 거쳐 1659년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1664년(현종 5년) 부제학(副提學),
이듬해 다시 대사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도승지(都承旨)를 역임,1668년 대사헌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 호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1672년(현종 13년)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인환(李寅煥):1633년(인조 11년)~1699년(숙종 25년)
조선의 문신.자는 문백(文伯),호는 생곡(生谷), 판서 시발(時發)의 손자, 경연(慶衍)의 아들.
1660년(현종 1년) 진사(進士)가 되고,166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검열(檢閱)에 보직되고, 대교(待敎)
정언(正言) 수찬(修撰)등을 지냈다. 지평(持平)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675년 (숙종1년) 부교리(副校理)로서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1680년 사간(司諫) 집의(執義),다음해 응교(應敎) 승지(承旨)등을 거쳐 1684년 대사간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극력 상소하여 관작을 복구하도록 했고, 대사성(大司成) 경상도 관찰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697년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뒤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인하(李仁夏)
조선의 무신.자는 하숙(夏叔),우의정 완(浣)의 조카.효종 초에 현감(縣監)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등을 거쳐
1654년(효종 5년) 어영대장(御營大將),1656년 충청도 수군절도사,1660년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과오를 범해 파직되었다.
그 후 복직되어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679년(숙종 5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있을 때,
덕원(德源)으로부터 거제도(巨濟島)에 이배(移配)되는 송시열(宋時烈)을 중로(中路)에서 후히 대접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삭출(削黜) 당했다.
1680년에 송시열이 풀려나자 다시 등용되어 1682년 병조참판(兵曹參判),이듬해 총융사(摠戎使),이어 한성부 좌윤(漢性府左尹)이 되었으나,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석방되어 복직했다.
◑이인소(李寅燒):1637년(인조 15년)~1698년(숙종 24년)
조선의 문신.자는 자명(子明),호는 노포(老圃),좌의정 경억(慶億)의 아들.1663년 (현종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여러 외관직(外官職)을 지내고, 1693년(숙종 1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이듬해 문학(文學)을
거쳐 홍문과(弘文館)에 등용되고,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696년 수찬(修撰)이 되어,관기의 문란,백성들의 생활고,
전화(錢貨)의 폐해등 상소했다. 이어 겸필선(兼弼善)을 거쳐 이듬해 교리(校理)를 지냈다.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이세필(李世弼):1642년(인조 20년)~1718년(숙종 44년)
조선의 문신 학자.자는 군보(君輔),호는 귀천(龜川).시호는 문경(文敬),항복(恒福)의 증손,이조참판(吏曹參判) 시술(時術)의 아들.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人).1674년(숙종즉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송시열이 삭직(削職)당하자, 그 신원(伸寃)을 상소하여 영광(靈光)에 유배 되었다가 1678년(숙종 4년) 풀려나왔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1684년 형조 좌랑(形曹佐郞)이 되었으며,용안현감 (龍安縣監) 삭녕군수(朔寧郡守)를 역임,1689년(숙종 15년)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여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文廟)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벼슬을 버리고 진위(振威)에 돌아가서 학문에 전심했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등용될 때 다시 김제군수(金堤郡守)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司僕시正)
장악원정(掌樂院正)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참판을 역임, 1717년 이이명(李이命)의 전횡(전횡)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학문에 전심하여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김제(金堤)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
◑이세귀(李世龜):1646년(인조 24년)~1700(숙종 26년)
조선의 문신.자는 수옹(壽翁),호는 양와(瀁窩),항복(恒福)의 증손,목사(牧使)시현(時顯)의 아들.1672년(현종 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1685년(숙종 11년)음보(蔭補)로경양도찰방(璟陽道察訪)이 되었다가 사직,1695년 다시 추천을 받아 예산현감(禮山縣監)이되고,
1697년 장령(掌令)을 거쳐 서연관(書筵官)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한 뒤 병으로 사직했다.
아들 광좌(光佐)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追憎),홍주(洪州)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祭享).
◑이송제(李松齊):1648년(인조 26년)~1733년(영조 9년)
조선의 문신.자는 수부(秀夫),호는 죽암(竹菴),호군(護軍) 의규(義奎)의 아들.함평(咸平)출신.1679년(숙종 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급제,1682년 전적(典籍),이어 동복(同福) 자인(慈仁) 남포(藍포)의 현감(縣監)을
역임한 뒤 삼례도(參禮道) 연서도(延曙道)의 찰방(察訪)을 지냈으며,1728년(영조 4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태좌(李台佐):1660년(현종 1년)~1739년(영조15년)
조선의 문신.자는 국언(國彦),호는 아곡(鵝谷),시호는 충정(忠定),항복(恒福)의 현손, 참판(參判)세필(世弼)의 아들.
1684년(숙종 10년) 진사(進士)가 되고, 1699년(숙종25년)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검열(檢閱) 지평
(持平)을거쳐1701년 사서 서(司書)로서 희빈(禧嬪)장씨(張氏)의 사사(賜死)에 적극반대하여파직된 최석정(崔錫鼎)
이명세(李命世)를 신구(伸救)하다가 선산(善山)을거쳐이듬해 암행어사(暗行御史)가되고,1708년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어 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 (吏曹參議) 1710년 대사간 승지(承旨) 대사성(大司成),1715년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숙종 말년에 소론(少論)의 세력이 약해지자 노론(老論) 일색인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1718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년)강화부 유수에 재임,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서 노론이 세제
(世弟:英祖)의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행하게 하자 이를 반대,취소하게 했고, 이어 형조 판서로서신임사화(莘壬士禍)때
노론을 모두 숙청하고 예조와 호조의 판서를역임했다.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밀려날 때 삭직(削職)당했으나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호조판서에 기용되고,
이후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순응하여 병조 이조의 판서를 지냈으며,이듬해 우의정,1729년 좌의정이 되었다. 다음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직, 1736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석인(李錫仁):1668년(현종9년)~1729년(영조 5년)
조선의 문신.자는 계수(季受),덕형(德馨)의 5대손.권유(權愈)의 문인. 1690년(숙종 16년) 진사(進士)가 되고,
1707년 경녕전 참봉(敬寧殿參奉)을 거쳐 여러 벼슬을 역임,공조 좌랑(工曹佐郞)때 노론(老論) 측 언관(言官)들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721년(경종 1년) 소론(少論)의 집권으로 내섬시 주부(內贍시主簿)에 등용되고 창평(昌平) 익산(益山) 김포(金浦)의
현령(縣令)을 역임, 예빈시 주부(禮賓시主簿)를 지내고 전주 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반군을 물리쳐 고을을 수어한 공으로 품계(品階)가 올랐으나
노론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광좌(李光佐):1674년(현종 15년)~1740년(영조 16년)
조선의 문신 자는 상보(尙輔),호는 운곡(雲谷),항복(恒福)의 고손,장령(掌令) 세귀(世龜)의 아들.
1694년(숙종 2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1697년 부수찬(副修撰)을거쳐 1708년 전라도 관찰사,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1715년(숙종41년)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숙종이 소론(少論)을 배척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자 이를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1718년 예조참판(禮曹參判)에 등용,1721년(경종1년)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司直)에재직중 이 해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仍君) 금(昑: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경종으로 하여금 이를 취소케 한 뒤에 신임사화(辛壬士禍)을
일으켜 노론(老論)을 제거, 소론정권이 수립되자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거쳐 병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가 되고,1723년 우의정1725년(영조1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당했다.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정의정에 오르고,실록청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경종실록(景宗實錄)][숙종실록(肅宗實錄)]보유편(補遺篇)의 편찬을 담당했다.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37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박동준(朴東俊)의 모함으로 울분 끝에 단식하다 죽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1755년 나주(羅州) 벽서사건(璧書事件)으로 관작이 추탈(追奪).
◑이종성( 李宗城):1692년(숙종 18년)~1759년(영조 35년)
조선의 문신.자는 자고(子固),호는 오천(梧川),시호는 효강(孝剛),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장단(長湍)출신.1711년(숙종 37년) 사마시(司馬詩)를 거쳐 1727년(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전적(典籍) 정언(正言)을 지내고 1728년 경상도 암행어사(暗幸御史)가 되어 민폐를일소,그후 헌납(獻納)
수찬(修撰) 교리(校理)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1736년 이조판서로서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 경기도 관찰사 형조판서를 지내고
1744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예조 형조의판서, 대사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등을 거쳐1752년(영조 28년)
좌의정에 올랐다가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도뛰어났으며,
재직중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莊獻世子)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이태화(李泰和):1694년(숙종 20년)~1759년(영조 35년)
조선의 문신. 자는 동장(東章), 호는 단암(丹菴), 시호는 영민(榮敏), 생원(生員) 몽려(夢呂)의 아들.
1711년(숙종 37년) 18세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전적(典籍)으로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했고 1725년(영조1년)옥구 현감(沃구懸監)에 재직중 이구(李逑)의 처를 노예로 하고 횡포한 짓을저질러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1727년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에 전심했다. 1758년(영조34년) 다시 기용되어 장령(掌令)이 되고, 승지(承旨),
호조 판서 등을 역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이종백(李宗白):1699년(숙종 29년)~1759년(영조 35년)
조선의 문신. 자는 태소(太素), 호는 목천(牧川), 시호는 정민(貞敏), 관찰사 형좌(衡佐)의 아들.
1721년(경종1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2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
부수찬(副修撰), 헌납(獻納), 집의(執義)를 역임,
1738년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거쳐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1741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병조참지(兵曹參知),
1749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조참판(吏曹參判), 함경도 관찰사, 호조참판을 거쳐 1754년 형조판서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1758년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대위(李大위):1709년(숙종 35년)~1784(정조 2년)
조선의 학자.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 군수(郡守) 수(洙)의 손자.
1679년(숙종 5년) 31세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성혼(成渾)의 천거로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이 되었다.
어머니의 병으로 관직을 물러난 후 참봉(參奉), 별좌(別坐), 찰방(察訪), 주부(主簿), 형조 좌랑(形曹佐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조광조(趙光祖)의 학통(學統)을 이었다.남원(南原)의 영천서워(寧川書院)에제향(祭享).
◑이경일(李敬一):1734년(영조 10년)~1820년(순조 20년)
조선의 문신.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 시호는 효정(孝定), 항복(恒福)의 6대손,
도사(都事) 종열(宗悅)의 아들. 항복의 종손(宗孫)이어서 음보(蔭補)로 온릉참봉(溫陵參奉), 덕산현감(德山縣監)
등을 지내고 1775년(영조 5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언(正言)을거쳐,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러 오은군(鰲恩君)에 봉해졌다.
그 후 공조, 형조의 판서,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1804년(순조4년) 좌의정에 승진, 1808년 봉조하(鳳朝賀)가 되었다.
◑이집두(李集斗):1744년(영조 20년)~1820(순조 20년)
조선의 문신. 자는 중휘(仲輝), 호는 파서(琶西), 구학(구鶴), 감역(監役) 진원(進源아들. 1774년(영조 50년)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廷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주서(注書)를 지내고,
1784년(정조 8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한식제(寒食祭)를 잘 치르게 한 공으로
문성진 첨절제사(文城鎭僉節制使)에승진했다.
그후 형조 참의(形曹參議), 이조 참의, 대사성(大司成), 승지(承旨), 안동 부사(安東府使)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1800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 판서에 올랐다.
1810년(순조 10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가 판돈령부사(判敦零府事)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나 앞서 정조가 지은 만천명 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자서(自序)를 해서(楷書)와 전서(篆書)로
첩(帖)을 써바쳤다.
◑이 격(李格) :1748년(영조 24년)~1803년(순조 3년)
조선의 무신. 자는 천로(天老), 호는 만오(晩梧), 동지중추부사 보만(보萬)의 아들.
선전과(宣傳官)을 거쳐 1769년(영조 45년)무과(武科)에 급제, 1773년(영조 49년) 부안현감(扶安縣監)이 되고,
정조 즉위 후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의 세도로 남양(南陽)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를 거쳐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을 지냈다.
◑이 벽(李檗) :1754년(영조 30년)~1786년(정조 10년)
조선의 천주교도. 원명은 덕조(德祚), 보만(보萬)의 아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등의
서학(西學) 토론회에 참석한 뒤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여 친척 이승훈(李承薰)에게 부탁, 중국에서 서적을 구득하고
남인(南人)들 사이의동지를 규합하여 천주교의 선고에 투신,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아 지도자가 되었다.
1785년(정조 9년) 신도 김범우(金範禹)의 체포로 서학운동이 표면화 되자 아버지가 그의 선교운동을 말리다가
목메어 자살한 사실에 충격을 받고 배교자(背敎者) 이기경(李基慶)의 권유로 천주교와 절연, 동지들과 교제를
끊었고, 이듬해 페스트로 죽었다.
◑이석규(李錫奎):1763년(영조 39년)~1842년(헌종 8년)
조선의 문신. 초명은 영석(永錫), 자는 치성(穉成), 호는 동강(東江),시호는효정(孝貞).
항복(恒福)의 7대손, 경관(敬寬)의 아들. 1783년(정조 7년) 사마시(司馬試)에합격한 뒤 참봉(參奉), 군수(郡守)
등을 지내고 1807년 (순조7년)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거쳐
1818년대사성이되었다.
1820년 대사간, 이듬해 공청도 관찰사(公淸道觀察使)를 지내고 1825년 형조, 이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
이듬해 예조판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827년 좌부빈객(左副賓客), 예조판서,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우참찬에 재임, 1830년
판의 금부사(判義禁府事), 1832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이예환(李禮煥):1772년(영조 48년)~1837년(헌종 3년)
조선의 학자. 자는 치화(致和), 호는 난국재(蘭菊齎), 고려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제현(齊賢)의 후손.
송치규(宋穉奎)의 문인. 학행(學行)으로 관찰사의 천거까지 받았으나 벼슬은 못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계조(李啓朝):1793년(정조 17년)~1856년(철종 7년)
조선의 문신. 자는 덕수(德搜), 호는 동천(桐泉), 시호는 문정(文貞), 석규(錫奎)의 아들.
1831년(순조 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헌종 때 이조참의(吏曹參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사성(大史成) 등을 역임하고, 1849년철종 즉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1852년 공조판서를 거쳐 185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유원(李裕元):1814년(순조 14년)~1888년(고종 25년)
조선의 문신.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墨農), 시호는 충문(忠文),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
1841년(헌종 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壯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의주 부윤(義州府尹),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世道)를 배경으로 고종 초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대원군(大院君)이 집권하자
그와 반목(反目), 1865년(고종 2년) 수원 유수(水原留守)로 좌천 되었다가 이해 영중추 부사(嶺中樞府事)로
전임되어「대전회통(大典會通)」편찬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다.
◑이현직(李顯稷)
조선의 무신. 자는 백형(伯衡), 총관(摠管) 격(格)의 아들. 1846년(현종 12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184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854년(철종 5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1857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5년(고종 2년) 총융사(摠戎使)에 오르고 1868년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어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었다.
◑이유승(李裕承):1835년(헌종 1년)~?
조선의 문신. 자는 경선(景先), 사시는 효정(孝貞), 영의정 항복(恒福)의 9대손, 계선(啓善)의 아들,
부통령(副統領) 시영(始榮)의 아버지. 1864년(고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68년에 평안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으로 재직중 1894년 제도 개혁으로 고정청(校正廳)이 설치되자
그 당상(堂上)이 되었고, 뒤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희수(李喜秀):1836년(헌종 2년)~1909년(융희 3년)
조선의 서화가. 자는 지삼(芝三), 호는 소남(小南), 경지당(景止堂), 상원(祥原)출신.
7세 때부터 조광진(曺光振)에게 글씨를 배워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행서(行書)의 각 체(體)에
능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나 난(蘭)과 죽(竹)을 잘 그렸다.필적으로는 모간(模刊)한 것이 전한다.
◑이주영(李胄榮):1837년(헌종 3년)~1913년
조선의 문신. 자는 순경(舜敬), 군수(郡守) 유헌(裕憲)의 아들. 1874년(고종 11년) 증광문과(增光文科)에 장원,
부교리(副校理),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등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검상(檢詳), 필선(弼善), 교수(敎授),
병조 정랑(兵曹正郞), 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 1895년(고종 32년) 귀족사장(貴族司長)이 되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科), 태의원경(太醫院卿),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910년(융희 4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男爵)이되었다.
◑이하영(李夏榮):1858년(철종 9년)~1919년
조선의 대신.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禁山) 외무아문 주사(外務衙門主事),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을
역임하고, 미국 주재 공사관 서기관(書記官)이 되었다가 귀국 후웅천(熊川)과 흥덕(興德)의 현감(縣監),
외무아문 참의(外務衙門參議), 승정원우부승선(承政院右副承宣), 회계원장(會計院長)을 역임,
1898년(건양1년) 주일전권공사(駐日全權公使), 이듬해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을 지냈다.
1899년(광무 3년) 다시 주일 특명전권공사, 1903년 특진관(特進官), 찬정(贊政), 이듬해외부 대신(外部大臣)을
지내고, 1905년(광무 9년) 법부 대신(法部大臣)이 되었다.
1907년(융희 1년)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이 되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본정부에 의해 자작(子爵)이
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이시영(李始榮):1868(고종 5년)~1953년
독립운동가, 정치가.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 시림산인(始林山人), 이조판서 유승(裕承)의 아들,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 1885년(고종 2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듬해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형조 좌랑(形曹佐郞)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94년 부승지(副承旨)가 되었다.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 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했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宮內府首席參議)를 역임,
1896년 장인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사직했다.
1905년(광무 9년)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으로 등용, 이듬해 평안남도 관찰사로나갔다가
1908년 한성 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法部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를지내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독립군의 양성에 힘썼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하고,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에 국무의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민주진영을 영도,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을 사퇴했다.
한편 대종교도(大倧敎徒)로서 1950년 원로원(元老院) 원장을 지냈으며 글씨를 잘 썼다. 국민장(國民裝)으로
정릉(貞陵) 남쪽에안장(安葬),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상설(李相卨):1871년(고종 8년)~1917
독립운동가.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補齋), 행우(行雨)의 아들, 용우(龍雨) 에게 입양(入養).
일찍부터 신학문에 뜻을 두어 영어,노어(露語),법률(法律)등을 공부하고, 1894년(고종 31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904년(광무 8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고 이듬해 의정부 참찬(參贊)에 올랐다.
이 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패했다.
1906년 이동녕(李東寧)등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 이주하여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우고 다시 만주 간도 용정(間島龍井)에 가서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교포 자제의 교육과 독립정신 고취에 전력했다.
1907년 화란(和蘭)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鐘)과 함께 헤이그에 가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음모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이떄 본국의 궐석재판(闕席裁判)을열어 사형을 선고하자 귀국을 단념, 영국, 미국을 거쳐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 잡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자 이동녕(李東寧)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를 발행하여 교포의 계몽과
산업발전에 공헌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이 석(李 錫) :1882년(고종 19년)~1909년(융희 3년)
조선의 의병장. 자는 사옥(士玉), 경북 청송(靑松) 출신. 1896년(건양 1년) 15세에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워 패하고
동지들과 산속에 숨었다가, 1905년(광무 9년)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용기(鄭鏞基)의 부하로 편입되어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워초장(哨長)에서 좌영장(左領將)이 되었다.
정용기가 전사한 후 중군(中軍)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여러 싸움에서 많은 적을 생포했으나
1907년 7월 적에게 대패하여 군사들을 해산하고 하산(下山)했다. 주막에서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탈출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여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이수경(李壽卿):1882년(고종 19년)~1955
현금(玄琴)의 명인(名人). 호는 송사(松史), 장악원 악사(掌樂院樂師) 원근(源根)의 아들. 서울 출신.
11세에 장악원 악공(樂工)이 되고, 1902년 전악(典樂), 1914년 아악수장(雅樂手長),
1933년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하고, 1940년 사퇴했다.
거문고 연주가 전공이나 악기(樂器) 제작에도 능하여 많은 명기(名器)를 남겼다.아악부(雅樂部) 악사로 있을 때
거문고, 정재(呈才), 악장(樂章) 등을 가르쳤다.
단소(短蕭)와 시조창(時調唱)에도 일가를이루었으며, 거문고에서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의탄주(彈奏)가 뛰어났다.
◑이시영(李始榮):1882년(고종 19년)~1929
독립운동가, 자는 중현(仲賢), 호는 우재(又齋), 관준(寬俊)의 2남. 대구(大邱)출신.
1914년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상해(上海) 등지로 내왕, 항일 무력봉기를 꾀했다.
뒤에 국내에 잠입하여 활약중 애국단(愛國團) 사건으로 대구에서 피체, 복역(服役)하다가 출감, 안희제(安熙濟),
최준(崔俊), 박상진(朴尙鎭), 서상일(徐相日) 등과 광복단(光復團)을 조직, 무기를 구입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19년 3·1운동 전에 지방 유림(儒林)들을 상경케 하여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밀송 했다.
3·1운동 후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병사했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했고, 유시(遺詩)가 있다.
◑이상정(李相定):1897년(광무 1년)~1947년
독립운동가. 일명 연호(然皓), 호는 산은(汕隱), 시우(時雨)의 아들, 상화(相和) 상백(相伯)의 형,
일본 고꾸라꾸잉 대학(國學院大學)을 졸업, 오산(五山)· 경신(儆新)· 계성(啓星)·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3년에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때 풍옥상(馮玉祥)의 막하에서 활약하다가
상해(上海)·남경(南京)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종사했고,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했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중경 육군 참모학교의 소장교관(少將敎官)을 지내고,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議政院議院)에 선임, 한편 유동열(柳東說) 등과 신한민주혁명당(新韓民主革命黨)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에 취임했다.
1941년 중국 육군 유격대 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이듬해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고급막료로남경전(南京戰)
한구전(漢口戰)에 직접참가했다. 해방 후 상해(上海)에 머물러 교포의 보호에 진력하다가 1947년 귀국, 뇌일혈로 죽었다.
시(詩)·서(書)·화(畵)에 능했고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고,궁중비사(宮中秘史)·
야사(野史)에 조예가 깊었다.
◑이규홍(李圭弘):1881년(고종 18년)~1929년
자(字)는 원오(元五), 호(號)는 오하(梧下)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기영(琪榮)의 장남으로 20세에 중추원 의관에
이른 수재(秀才)였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의병을 모아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마치고
임병찬(林柄瓚)에게 알리니 답서에 군정수칙(軍政守則)과 경계교시(警戒敎示)를 내려주어 1907년(丁未年)에
이석용(李錫庸)·문태수(文泰洙) 등과 합세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1918(戊午年)에중국상해 (上海)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요원(臨時政部要員)인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및 김규식(金圭植)·김좌진(金佐鎭) 등을 만나
군자금등의 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귀국하여 송창재(宋昌在) 집에서 숨어 살다가 1924년 체포되어 수감되니 정미의거(丁未義擧)는 18년이 지나
시효가 지났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死境)에 이르러 출감하였으나 1929년 6월 6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
◑이회영(李會榮):호(號)는 우당(友堂), 1908년 장훈학교(長薰學校)를 설립하였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전심을 기울였다.
1910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보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영훈장단장(大韓民國 建國功榮勳章單章)이 수여되었다.
◑이상화(李相和):1901년(광무 5년)~1943년
시인. 호는 상화(尙火), 시우(時雨)의 아들. 경북 대구(大邱) 출신으로서 중동학교(中東學校)를 거쳐, 도오꼬오
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 불어과(佛語科)를 졸업, 귀국하여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 교사로 있었다.
1917년 교향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현진건(玄鎭健)·이상백(李相佰) 등과 습작집(習作集) 「거화(炬火)」를간행,
1922년에는 「백조(白潮)」동인으로 창간호에 시(詩)<나의 침실(寢室)로>를 발표,
이어서 <가을의 풍경><말세(末世)의 희탄(稀歎)><그날이 그립다>등 탐미적(耽美的)인 서정시를 썼다.
1926년 「개벽(開闢)」지에<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新傾向派)의 대열에 가담,
<역천(逆天)><태양의 노래>등 일련의 반항시(反抗詩)를 발표하다가 1935년부터 약 2년 동안 중국을 방랑했다.
백기만 편(編)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수록된 19편의 시 외에 여러 편의 번역시(藩逆詩)를 남겼다.
1948년 3월 동향(同鄕) 출신의 서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2. 現·近代著名人士(현·근대 저명인사)
<무순위로 기록하였으며, 직책 및 직급이 변동되었을 수 있습니다.>
◎ 이갑성(李甲成):前33인유족회장, 前광복회장
◎ 이병철(李秉喆):경제인협회장, 중앙일보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前삼성그룹회장
◎ 이임용(李壬龍):태광산업창설, 흥국생명사장, 태광산업 회장, 중앙화수회 부총재
◎ 이민우(李敏雨):신민당민의원, 신민당원내총무, 국회부의장, 현신민당총재, 중앙화수회부총재
◎ 이성우(李成雨):치안국장, 내무부차관, 안전씨스템 사장, 중앙화수회장
◎ 이두학(李斗鶴):새마을금고전국연합 회장, 현진일건업 대표이사, 중앙화수회 부총재
◎ 이종원(李鍾元):前법무부장관, 변호사
◎ 이종수(李鍾壽):국회의원
◎ 이정우(李町雨):前국회의원, 변호사
◎ 이상희(李相禧):前국회의원, 前중앙화수회장
◎ 이영호(李永鎬):前체육부장관
◎ 이종찬(李鍾贊):前국방부장관 前중앙화수회고문
◎ 이훈동(李勳東):조선내화화학공업(주)대표이사
◎ 이규호(李圭浩):前문교부장관
◎ 이찬우(李燦雨):前중앙화수회장, 초대노동청장,前국회의원
◎ 이종찬(李鍾贊):국회의원,민정당운영위원
◎ 이민우(李敏雨):前국가안보위원장 예비역중장
◎ 이형배(李炯培):국회의원
◎ 이재우(李載雨):국회의원
◎ 이중희(李重熙):전국구 국회의원
◎ 이동진(李東鎭):국회의원
◎ 이성일(李成一):국회의원
◎ 이상철(李相喆):코오롱사장
◎ 이춘우(李春雨):부회장
◎ 이홍배(李洪培):전국구 국회의원
◎ 이진우(李珍雨):국회의원
◎ 이필우(李弼雨):전국구 국회의원
◎ 이성수(李聖秀):국회의원
◎ 이철우(李轍雨):국회의원
◎ 이건일(李健一):국회의원
◎ 이상익(李相翊):국회의원
◎ 이성호(李聖浩):국회의원
◎ 이용희(李龍熙):국회의원
◎ 이재옥(李在玉):국회의원
◎ 이규석(李圭錫):前 청주시장
◎ 이윤영(李允榮):고려대학교 법과대학장
◎ 이응남(李應南):단국대학 교수
◎ 이종록(李鍾祿):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장
◎ 이지훈(李知勳):청주대학 교수
◎ 이장우(李樟雨):한양대학 교수
◎ 이재우(李宰雨):건국대학 교수
◎ 이홍우(李洪雨):서울대학교 교수
◎ 이상우(李常雨):연세대학교 교수
◎ 이황우(李璜雨):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 이상보(李相寶):국민대학교 교수
◎ 이형환(李炯煥):건국대학교 교수
◎ 이상비(李相斐):원광대학교 교수
◎ 이상일(李相日):성균관 대학교 교수
◎ 이상옥(李相沃):서울대학교 교수
◎ 이경희(李庚熙):건국대학교 교수
◎ 이춘희(李春熙):성균관대학교 교수
◎ 이성환(李晟煥):건국대학교 교수
◎ 이재윤(李在潤):중앙대학교 교수 KAIST기술경영 연구실장
◎ 이상률(李相律):법무부조사과 검사
◎ 이정우(李正雨):대법원 판사
◎ 이태우(李泰雨):서울북부지원, 부장판사
◎ 이순우(李淳雨):변호사, 前고등법원 부장판사
◎ 이용우(李勇雨):사법연수원 교수
◎ 이상배(李相培):前경북지사
◎ 이상완(李相完):서울북부지청 검사
◎ 이명희(李明熙):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 이완희(李完熙):변호사, 前부장판사
◎ 이원섭(李元燮):마산지청 부장검사
◎ 이재창(李在昌):내무부 민방위 본부장
◎ 이복영(李福榮):경남건축 대표
◎ 이규창(李圭昌):현대건설 전무이사
◎ 이규징(李圭澄):국민은행 본점이사
◎ 이보현(李輔鉉):전매청 관리국장
◎ 이종민(李鍾敏):헌국금속 협동조합 전무이사
◎ 이종욱(李鍾旭):한국과학 기술원 경제기술 연구실장
◎ 이경우(李景雨):동경섬유 대표이사
◎ 이근양(李根陽):前대한석탄공사 사장
◎ 이창우(李昌雨):부산파이프(주)회장
◎ 이선우(李善雨):경원농장 대표
◎ 이상원(李相元):前중앙화수회부회장
◎ 이옥성(李沃城):동양화가
◎ 이상택(李相澤):안양 병원장
◎ 이원두(李源斗):서예가
◎ 이종만(李鍾萬):동아전기 사장
◎ 이종윤(李鍾潤):중앙화수회 부회장, 前서울시 건설국장
◎ 이종연(李鍾淵):부회장, 삼당장학회 회장
◎ 이익순(李翼淳):부회장, 한중무역상사 사장
◎ 이규수(李圭秀):부회장, 울산시 화수회장
◎ 이성기(李成基):부회장, 럭키상사 대표
◎ 이규문(李圭文):예비역준장
◎ 이익우(李益雨):부회장, 변호사
◎ 이상열(李相烈):경주중고교 이사장
◎ 이종두(李鍾斗):前보안대장
◎ 이건영(李建榮):문화방송국 편집국장
◎ 이규창(李圭昌):前광복회 부회장
◎ 이종우(李鍾佑):정제 한의원 대표
◎ 이종림(李鍾林):신일전기 사장
◎ 이선우(李先雨):서울 시외전화국장
◎ 이태희(李泰熙):대구 성서중고등학교 이사장
◎ 이재철(李在喆):의정부시 교육장
◎ 이재훈(李在勳):前서대문경찰서장
◎ 이건희(李健熙):삼성그룹회장
◎ 이상규(李相珪):청소년연맹 총재. 예비역 중장
◎ 이종윤(李鍾潤):전주대학교 총장
◎ 이무진(李武鎭):삼보물산 대표
◎ 이성희(李晟熙):홍익대학교 교수
◎ 이장희(李章熙):아주대학교 교수
◎ 이열우(李烈雨):육군대령
◎ 이민형(李旻炯):(주)동국 단해공압공업 공장장
◎ 이치우(李致雨):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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