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가훈(慶州李氏家訓)

2022. 11. 24. 17:45카테고리 없음

慶 州 李 氏 家 訓
경 주 이 씨 가 훈

 

於益齋先生眞自贊
어익재선생진자찬

홀로공부하여 고루하였고,도를 들은 것은 자연히 늦었다. 불행은 모두가 자신이 만든것, 어찌하여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백성에게 덕 보인것, 무엇이기에 네 번이나 대신이 되었단 말이냐. 요행으로 이렇게 된 것이기에 다만 모든비난을 불러들였다. 못난 내 얼굴 그려 두면 무엇하나,너의 후손에 알리기 위함이다. 한번 쳐다보고 세 번씩 생각하여 그런 불행을 저지를까 경계하여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노력하여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행여나 불행을 면하게 되리,무겁고 단단한것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요, 씻어서 새롭게 하기는 사람에게 매였다.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어야 하고, 스스로를 속임이 없어야 한다. 썩은 새끼로 말을 다루듯 조심하고 마른나무 가지에 매달리듯 조심하라. 나아갈 때에 물러설 줄을 알아야하고 편안할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불편한 일이 있어도 재앙되지는 않는 것이니,생각이 늘 이에 있으라.

 

-익재선생 진자찬에서-

지은이:이제현(李齊賢) 1287년~1367년(공민왕16년졸)
자는 중사(仲思)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력옹(翁)
*력=도토리나무 력.
공민왕 묘정에 배향,경주의 귀강서원,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시호는 문충이다.
저서로는 익재난고,익재집,역옹패설,효행록,서정록,사략등이 있다.


文 忠 公 家 訓
문 충 공 가 훈

백사 이문충공 항복이 집안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날 성인이 예절을 마련할때 사람의나이가 일곱살을 넘어면 남자와 여자가 같은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형수와 시숙은서로 통하여 방문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남녀간에 있어서 꺼리고 삼가하는 뜻이 지극히 세말하고 또한 자세한것으로, 이와같이하지 않으면 후세에 꺼리는 일을 막을수가 없어 음탕한 마음의 근원을 일으키게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그런데 후세의 사람들이 이뜻을 알지 못하고, 친척이서로 접대하는데 분별이 있으면 일가 친척을 화목하게 하는데 모자란다라고 말하며 인정이 없는 것으로 지목하고,법도가 없는 집안에서는 친척이 서로 사랑한다라고말하면서 남녀가 함께 무릎을 맞대고 앉고 한상에 앉아서 밥을먹고,익살스럽고 방탕한 말을 하고 우습고 오만한 짓을 터놓고 해서, 금수와 같은 지경으로빠져 들어가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혹은 비방하는 말이 감정밖에서 일어나고 변고가 집안에서 생겨,몸을망치고 일가친척을 망하게 만드는데이른 뒤에야 뉘우친다. 이를 가히 경계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지은이 : 이항복(李恒福).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 이다.

임진왜란 이래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로 병권을 잡고 크게 활약하였다. 우의정으로 지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 다음해 우의정에 전임되어 도원수로 도체찰사등을 겸직, 이어 영의정에 승지하여 1602년 오성부원군에 진봉,1604년 호성일등공신에봉해 졌다.1617년 폐모의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극력반대하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별세했다. 별세한 해에 복관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의 화산서원,북청의노덕서원에 제향되었다.

 

경주이씨는 신라건국의 모체인 사로의 육부중 알천양산촌을 다스렸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받들고, 신라말에 소판 벼슬을 지낸  진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여 왔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이씨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이씨는 대체로 고려 초기에서 부터 훌륭한 인맥을형성하여 벌족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조선조에 와서도 명현과 학자를 배출시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