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5. 14:56ㆍ▣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
■ 시조유허 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 삼가 살펴 보건데 경주이씨 옛 족보에 " 시조의 이름은 알평(謁平)인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서 초강(初降)하였다. 초강 이라는것은 강생(降生:낳다),하였다는 뜻일것이다.
시전에 유악강신(維嶽降神)하야, 생보급신(生甫及申), 이로다. 생각 컨데 묏부리가 신을 내려서 보아 신을 낳았도다. 묏부리의 제사를 잘 지내면 감동하여 좋은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 하였다. " 보는 보(甫)의 제후인 후작 보후(甫侯)이고 신은 신(申)의 제후인 백작 신백(申伯)을 의미한다 " 라고 하였으니 소자첨(蘇子瞻:소동파의 자)이 신(申)과 여(呂:甫를말함, 甫라고 부르기 전에는 呂라고 불렀음)가 다 묏부리에서 내려 주엇다고하였으니 옛날이나 현재나 그 전해지는 것이 거짓이 없을것이다.
대개 뫼가 높고 신령이 맑아서 그 기운이 정수를 모으고 영채를 길러서 철인(哲人)을 낳는것은 이치의 필연적인 결과인데 유독 우리나라 동경지(東京誌)에만 육부(六部 : 경주이씨 세보 서문을 보라)의 대인들이 다 하늘에서 강생 하였다고 기록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다.
신인이 태백산단목(太白山檀木), 아래에 강생하여 단군이 되었으니 나정부(羅井部)의 알에서 나온 사람이좌명공신9佐命功臣)이 되었느니 하는 등의 말이 옛날부터 전하여 이어왔다. 이것은 내려오는 전설의 말이어서 의심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 하는것은 물론 단정짓기 어려운 일이나 오직 이 표암일구가 급량 대인의 유허로서 우리 이씨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고 하는것은 명백하다.
시조 이래로 덕을쌓고 인을 쌓아서 여경9餘慶)이 자손에게 미쳐서 신라와 고려 사이에 높은 관작(官爵)이 연이어 왔고 이름있는 선비가 잇달아 왔다. 우리 조정(朝廷 : 조선국)에 들어와서 가지가 뻗고 파가 갈리어 자손이 여러 수십만이 되어 혹은 재상 이 되고 혹은 정경(正卿:판서), 아경(亞卿:참판),이 되어 대대로 아름다움을 이루어서 二千年 동안에 빛나고 커서 우리 동방의 명망있는 씨족이 되었다.
이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의 음덕이 도와주고 덮어준데 의한 것이다. 금오산(金鰲山)기슭 어느곳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지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도 증빙 할바가 없으서마침내 실전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자손들이 추원(追遠)하고 사모하는 바는 오직 표암만이 그대로 있다.
헌종(憲宗)一年丁未(1837년)에 후손 집성(集星)이 영양(永陽)군수가 되었을때 표암위에 새겨 표지 하였다. 여러 경주의 자손들이 이것만으로는 유적을 천양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돌을구하여 구륭형(穹隆形)의 비(碑)를 표암 아래에 세우려 한다.
종인(宗人), 요신(堯臣)이 비로소 와서 나, 경일(敬一)에게 비문 쓰기를 요청하였다. 내가 생각컨데 이 일은 여러 일가들과 상의하지 않으면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을것같으나 그 근본을 잊지않는 다는데 대개 같을줄 안다. 비를 세운 뒤 영구히 보호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두드려서 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것은 경주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다.
후손 대광보국 숭록대부9大匡輔國 崇祿大夫),원임 좌의정(原任左議政 : 원임은 전직이라는 뜻임),오은군 (鰲恩君) 경일(敬一)은 글을짓고 정헌대부 형조판서(正憲大夫 刑曺判書)겸,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의 지사(知事),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官) 집두(集斗)는 삼가쓴다. - 끝 -
■ 참고내용. ◎ 정공 이경일 1734(영조10)∼1820(순조2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으로 영의정 항복(領議政 恒福)의 6세손으로 세장(李世章)의 증손이며 문좌(李文座)의 손자로서 도사 종열(都事 宗說)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서울 출신이다.
영조 44년(1768) 음보로 관직에 나가 온릉 참봉, 덕산 현감(德山縣監)으로 1775년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문과 정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듬해 예조 좌랑, 정언을 거쳐 부수찬, 대사간, 이조 참의, 황해도 관찰사,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1800년 공조 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 우참찬, 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순조 4년(1804) 한성부 판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1808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오은군(鰲恩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며, 저서로 시문을 모은 《청헌유고(聽軒遺稿)가 있다. ◎ 서 이집두(琶西 李集斗) 1744(영조20)∼1820(순조2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휘(仲輝), 호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瑾鶴)이다. 형조판서 시발(刑曺判書 時發)의 6대손이요, 좌의정 경억(慶億)의 5대손으로 감역 진원(李進源)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50년(1774)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주서(注書)가 되었다. 그뒤 이조 좌랑으로 한식제(寒食祭)를 잘 치른 공으로 문성진 첨절제사에 올랐다. 이어서 장령, 이조 참의, 대사성, 승지를 거쳐, 대사간, 대사헌과 외직으로 안동 부사, 정조 22년(1798)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고, 1800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 즉위 후 1804년 8월 7일에 한성부 판윤에제수되었고 그 후에도 1809년, 1811년 세차례에 걸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 예조 판서가 되고 1810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판돈녕 부사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기로소 (耆老所)에 들었다.
글씨에 뛰어 났으며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자서(自序)를 해서와 전서로 첩(帖)을 써 바치기도 하였다. 아들 일영(一榮)이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손자 규방이 3번의 형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 이름났고 고종때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은 파서공의 5대손이다. 묘지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미암리 산109-17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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