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공파 소개 [사인공전 역문]

2011. 8. 16. 10:21▣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

舍人公傳 譯文 (사인공전 역문)

날 文章(문장)의 선비가 기품이 대개가 맑고서도 깨끗하였으니, 漢(한)나라의 蔡伯階(채백계)와 唐(당)나라의 王子安(왕자안)과 李長吉(이장길)무리가 모두 文學(문학)으로 조정에 올라 그들이지은 것이  音樂(음악)에 오르고 제사에 쓰게 되었으므로 金石(금석)에 새기어 전하고 名山(명산)에 보관되기도 하였으니 一代(일대)에 지극히 선출한 人才(인재)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람으로 재주는 있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여 後人(후인)들이 애석하게 여기었으니 慶州(경주) 李舍人公(이사인공) 이라는 분이 가장 이에 가깝도다.舍人(사인)의 집에는 큰 선비와 큰 學問(학문)이 많았다.悅幹(열간) 핵(핵)의 夫人(부인) 金氏(김씨)가 친히 그 자제 仁挺(인정), 진(진),世基(세기)에게 書史(서사)를 가르치어 크게 門戶(문호)를 열었으니   {仁挺(인정)의 아들}부(부), 규(규), {진(진)의 아들}琯(관), 齊賢(제현)   {세기(세기)의 아들}천(천),邁(매) 과(과)는 謫仙 李太伯(적선 이태백)의 재주라 칭했다.舍人公(사인공)은 世基(세기)의 아들이며 천(천)의 막내 아우로 문장이 일찍 성취되어 高麗(고려)의 말기에 크게 울리었다.그의 이름은 조(조)니 江華(강화)로 유배 되었다가 郭山(곽산)으로 배소를 옮기었다. 후세에 誌石(지석)을 얻었는데 이르기를, 七世孫(칠세손) 尊(존)이 學行(학행)으로 천거되고 그 아들은 春霖(춘림)春雨(춘우)니 丙子(병자)1636年 胡亂(호란)에 형제가 순절하였으니 아! 공이 일찍 돌아가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그 후에도 또한 미약하였으니 대체로 하늘이 문장을 내매 재주에는 후하고 운명은 박한 것인가?外史氏(외사씨)가 말하기를,『顔淵(안연)이 죽으매 孔子(공자)께서 斯文(사문)이 전하지 못함을 한탄하였으니, 이는 斯文(사문:道學을 말함)의 운수로서 한 경서도 후손에 전하지 못한 것이 더욱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