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원 스님에 대한 고찰.

2011. 8. 31. 14:16▣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인물


■ 족보(族譜)에 없는 익재중형(益齋仲兄) 체원(體元)스님에 대한 고찰(考察) -

一. 머리말

오문(吾門)의 족보(族譜)에는 익재공(益齋公)의 형제(兄第)가 삼형제(三兄第)로 나타나 있지만 1478년(成宗 9) 간행된 동문선(東文選) 제84권에 최해(崔瀣)가 쓴, 송반룡여대사서(送盤龍如大師序)에 보면, 익재공 이제현(益齋公 李齊賢:1287-1367)에게는 법명(法名)을 체원(體元)이라고 하는 중형(仲兄)이 있었다.

그리고 최해(崔瀣)는 익재공 과 함께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文名)을 떨친 분인데 그가 이렇게 적었다.

여공(如公:체원을 말함)은 소년시절에 머리를 깎고 선불(選佛)의 장소에 고보(高步)하였으며, 태위상왕(太尉上王)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승직(僧職)을 높이고 명찰(名刹)을 제수 받았으나,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차마 좌우를 떠나지 못하고 탕약(湯藥)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죽은 뒤에도 더욱 형제간에 우애 하였으니, 대개 그 효도(孝道)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사(師:體元을 말함)는 동암(東庵) 이문정공(李文定公)의 둘째 아들인데, 지금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국상(國相) 익재(益齋)공의 형(兄)이다.

친교 맺기를 좋다하여 당대의 이름난 귀공자인 회안군(淮安君)과 그 아우 창원공(昌原公)같은 이도 다 사(師)를 경애(敬愛)하였다.

二. 체원의 저술 과 활동상.

체원(體元) 스님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그의 저술편찬 년대(著述編纂年代)를 통하여 1313년(忠宣王 5)부터 1344(忠惠王 5)때 활약한 화엄종(華嚴宗) 승려(僧侶) 로서 해인사 계통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저술로는 일종의 주해서(註解書)로 모두 해인사(海印寺) 사간판(寺刊板)으로 간행되어 현제 해인사의 사간장(寺刊藏)에 남아있는데 “백화도장발원문약해(白華道場發願文略解)”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設法門別行疏)” “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 등과 그의 저술은 아니나 체원의 발제(跋題)가 들어있는 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이라는 위경(僞經)의 발문(跋文)이다.

위의 저술에서 살펴보면 체원(體元)이란 법명(法名)이며 달리 법호(法號)로서 목암(木庵) 또는 향여(向如)라 했고, 시호(諡號)는 각해대사(覺海大師)다. 그리고 그가 삭발한 구체적 동기는 알 수 없으나, 20세(世)전후 삭발한 뒤, 선불장(選佛場)에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 하였으며 한때 태위상왕(太尉上王) 즉, 충선왕(忠宣王)의 지우(知遇)를 받아 승직(僧職)이 오르고 명찰(名刹)의 주지 직을 제수 받기도 하였으나 노부모의 봉양을 핑계로 거절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소속된 화엄종(華嚴宗)은 당시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법수사(法水寺), 반룡사(盤龍寺), 경주의 동천사(東泉寺) 등, 당시 지방을 대표하는 사찰(寺刹)들인데 화엄종이 신라 의상(義湘)스님이 우리나라에 전 한 이래 고려전기 까지 불교계를 주도한 대표적 교종이었지만, 무신 집권기 이후 두렷한 행적을 남긴 화엄종승을 찾아보기 힘든 시기에 바로 화엄종풍(華嚴宗風)을 진작 시킨 분이, 체원(體元)스님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14세기초반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반룡사(盤龍寺)였으며 이때 핵심 인물이 체원(體元)이라는 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체원(體元)은 1324년(忠宣王 11)에 반룡사의 주법(主法)으로 임명될 때 “법수당두(法水堂頭), 즉 법수사(法水寺)를 중심한 우두머리라는 칭호라든가, 체원(體元)을 화엄종 자체에서 추천한 후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윤허(允許)를 얻은 후에 반룡사의 주법(主法)으로 등장시키는 절차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體元은 40세 전후인 1320년-1330년대 반룡사의 주법(主法)으로 있으면서 해인사를 중심한 화엄종단 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 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 해인사 수종의 주해서(註解書)와 공덕소경(功德疏經)의 간행에 착수했다고 보인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體元은 李瑱(1244-1321)을 아버지로 한 경주이씨(慶州李氏), 로 1280년대 초(初)에 출생하여 20세 전후에 해인사 계통의 화엄종 승려로 출가하여 40세 전후인 1320년-1330(忠宣王)때 법수사(法水寺), 반룡사(盤龍寺), 해인사(海印寺) 등지의 화엄종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 의 활약상은 자료가 없어 알수없다.

三. 체원의 화엄사상(華嚴思想)

체원은 그의 저술 별행소(別行疏)에서 보현행원(普賢行願)의 입장에서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통한 실천신앙을 강조 하였고 이러한 실천신앙의 배경을 징관소(澄觀疏)등의 화엄사상에서 찾으려 하였으며 구체적 실천신앙의 예를 “법화경(法華經)” 신앙의 영험(靈驗)과 감응(感應)에서 찾으려 했으며 體元이 관음신앙을 강조한 현실적인 여건이 14세기 초, 원(元)나라 지배하(支配下)라는 점과, 관음신앙이 현실적인 구원을 표방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상(義湘) 이래, 화엄종이 표방한 실천신앙(實踐信仰)의 측면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體元이 화엄종 출신이면서 실천신앙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사적(思想史的) 저변에는 당시 원(元)의 지배기에 있어 화엄종이 지배신분에 대한 이념적(理念的) 역할을 담당 할 수 없게 됨으로, 기층사회(基層社會) 속에서 그 역할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리하여 體元은당시 불교계의 자각 운동을 전개하여 탕화(湯火)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구현(具現)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四. 맺는말

족보에 동암공 이진(東庵公 李瑱)의 배위(配位) 기록을 보면 초취(初娶)의 성씨는 미상(未詳)이나 아들 한분(一男)을 두셨고, 재취(再娶), 진한국 부인 박씨(辰韓國夫人朴氏)께선 삼남(三男)을 두셨으니 동암공은 모두 아들 사형제(四兄第)를 두셨다.

그러면 1684년(朝鮮肅宗10) 간행된 오문(吾門)의 가장 오래된 갑자보(甲子譜) 이후, 지금까지 왜 동암공(東菴公)의 둘째아들 체원 스님의 기록은 없을까? 향후 많은 연구와 고증(考證)을 통하여 세상에 밝혀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五. 참고내용

◎ 최해 崔瀣(1287-1340)

慶州崔氏로 고려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학자로 자(字)는 언명부(彦明父, 壽翁, 호(號)는 졸옹(拙翁), 예산농은(猊山農隱),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지냈고 문장(文章)으로 중국에 까지 이름을 떨쳤다. 저서(著書)로 동인지문(東人之文), 졸고천백(拙藁千百))이 있다.

◎ 화엄경(華嚴經)

화엄경 이라 부르는 불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대방광’ 이란 대승 곧, 진리를 의미하고 ‘불화엄’ 이란 아름다운 연꽃으로 옥대(玉臺)를 장식하듯 보살이 여러 가지 꽃으로 부처님의 연화장 세계를 장식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주제(主題)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과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의광대한 공덕에 대해 설한 경전입니다. 따라서 화엄경의 전체적인 주제는 한마디로 여래의 해탈세계와 보살의 실천으로 요약됩니다.

◎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최고 통치기관으로서 문종 때의 중서문하성(中書文下)을 1275년(忠烈王 1)에 첨의부(僉議府)로 개칭 하였고, 1298년(忠烈王 24)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개칭 하였다. 원(元)나라의 내정간섭에 의해 설치된 것이었는데 1356년(恭愍王 5)에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취하면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尙書省)을 복구하고 도첨의사사는 폐지하였다.

◎ 법수사(法水寺)

법수사는 경상북도 성주군 가야산 기슭의 중기(中基)마을(오늘날 수륜면 백운리)에 있던 사찰이다. 802년(新羅 哀裝王 3)에 금당사(金塘寺)로 창건 되었으며, 고려 때 중창하며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592년(宣祖 25)임진왜란때 불에 탄 뒤, 폐사 되었는데 한때는 건물이 총 천 칸이 넘고 부속 암자가 백여개나 되는 큰 절이었다.

◎ 반룡사(盤龍寺)

신라 원효(元曉:617-686)가 창건 했다고도 하고 헌덕왕(憲德王: 재위09-826)의 아들인 왕사(王師) 심지(心地)가 창건 했다고도 한다. 고려 때는 안적암(安寂庵), 은선암(隱仙庵), 취운암(翠雲庵), 대적암(大寂庵), 내원암(內院庵)등의 암자를 거느린 대사찰(大寺刹) 이었고, 1592년(조선 선조25)임진왜란 때 불에탔다.

1641년(인조 19)계운(戒雲)과 명언(明彦)이 중창 하였고, 조선말에 또 불에 탄것을 1920년 운학(雲鶴)이 중창해서 오늘에 이른다. 예로부터 관음 기도처로 유명하다.

六. 참고문헌

* 東文選

* 慶州李氏 戊辰譜

* 體元의 著術과 華嚴思想(蔡尙植著)

* 네이버 백과사전

2007年 10월

野 村 李在薰

옮긴이 : 야촌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