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6. 19:57ㆍ▣ 시대별 한국왕/시대─고구려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대의 대외진출기도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체제정비를 도모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정책은 기왕의 부족적 관념체계를 극복하며, 나아가서는 초부족적 국가질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373년에는 국가통치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부족국가시대 이래의 관습법체계를 일원적인 공법체계로 재구성하고 성문화함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체제정비를 위한 시책은 고구려가 4세기말∼5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틀을 마련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374년·375년·376년에 잇달아 백제를 공격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그치지 않았으며, 또 378년에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북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前秦)과 372년과 377년에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력의 분산을 막을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가체제정비를 위한 일련의 시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되었다. 죽은 뒤에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海東高僧傳
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가지 檢討(李萬烈, 柳洪烈博士 華甲紀念論叢, 1971)
高句麗律令에 관한 一試論(盧重國, 東方學志 21,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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