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6. 20:17ㆍ▣ 시대별 한국왕/시대─백제
▶ 도림의 계락
백제의 제21대왕으로서 455년부터 475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고, 22대왕인 문주왕은 그의 아들이다.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되었다.
475년의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의 간첩으로 파견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는 한편,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면도 있지만, 도림의 계략에만 연결시킨 단순화된 설명은 보충이 필요하다.
▶ 고구려와의 관계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는 한편, 고구려와의 사이에 요충지인 청목령(靑木嶺: 현재의 개성부근으로 추정됨)에 방벽을 설치하여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北魏)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고구려와 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내정의 실패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제라동맹(濟羅同盟)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 때문이었다.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위협에 고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도성이 공격을 받아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강화를 시도하여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을 보면,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뒤의 文周王)와 여곤(餘昆: 文周王의 아우이자 東城王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위시한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인 반면, 당시 백제의 큰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개로왕이 왕궁을 거대하게 짓는 등의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속에서 그들을 배제시킨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는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개로왕은 백제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하여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실정(失政)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귀족인 해구(解仇)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중심 정권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만들었고, 그로 인한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건축 등의 강행은 하층민을 위시하여 널리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져왔을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전(都彌傳)에 나타나는 개루왕은 고구려 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적인 내용에서 왕은 잔인한 방법으로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 함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묻힌 곳은 알려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魏書,
宋書,
日本書紀,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盧重國, 韓國史論 4, 서울대國史學科,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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