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대왕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

2011. 8. 16. 21:34▣ 시대별 한국왕/시대─신라

<민애왕 릉 >


민애왕(敏哀王)이라고도 표기한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명(明)이다. 아버지는 뒤에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봉해진 충공(忠恭)이고, 어머니는 선의태후(宣懿太后)로 봉해진 귀보부인(貴寶夫人) 박씨(朴氏)이다.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로 혜충태자(惠忠太子)로 봉해졌다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仁謙)이고, 할머니는 성목태후(成穆太后) 김씨이다. 그리고 비(妃)는 각간(角干) 영공(永公)의 딸 윤용부인(允容夫人) 김씨이다.

 

본래 김명은 희강왕(僖康王)이 되는 제륭(悌隆)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해왔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조카인 제륭(균정과는 삼촌임.)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侍中)인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張保皐)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 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達伐: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현재 경주에는 민애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왕릉이 있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