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찿고 민족의 정기를 세우려던 수많은 애국지사들 중에서도 광복의 최고 지도자는 역시 보재 이상설 선생이 십니다. 선생 께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우리 나라를 에워싸고 있떤 무렵인 1870년(고종7년) 12월7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와 어머니 벽진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탄생 하셨다.
선생의 자는 순오(舜五)요,호는 보재(溥齋),본관은 경주 고려말 익재(益齋)이제현(李齊賢)의 23세 손이요, 어려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셨떤 이용우 분께 출계(양자)하여 학문에 전심했다.
선생 께서는 나이 25세가 되던해 189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당시율곡(栗谷),이이(李珥)의 학문을 조술(祖述)할 학자로 칭송되리만큼 학문이크게 성숙되 있었고 그후 관계에 진출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를 거쳐 27세에 성균관 관장(오늘날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셨다.
그후 관직이 승승장구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 법부(法部)와,학부(學部)를경유,36세가되던 1905년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셨다.
그러나 그해 11월18일 고종의 반대를 무시하고 을사 보호조약이 새벽에 발표되는 민족의 비운을 맞이하여 순국(殉國)의 결의로 그 파기에 진력했지만 돌이킬수 없음을 께닫고 5섯차례에 걸친사직서를 올리어 관직을벗고, 그 유명한 헤이그 밀사를 비롯한 조국 광복운동에 생애를바쳤다.
선생께서는 구학문을 수학한 왕조관인(王朝官人),시지만 누구보다 앞장서 신학문을 받아들여 구미(歐美)의 정치,경제,문화를 섭취 하셨어며 영어,러시아,일어에도 유창하셨다. 또한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금을 울리고, 옥을케는" 명 문장가로 칭송 되셨다.
더욱이 격변하는 세계 정세와 국제 정치를 탐구하시어 약소 국가의 민족 진로를 밝힐수있는 당대의동량(棟梁)으로 추앙되시었고 또한 스스로 앞장서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참형과 다름없는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 하시었다.
그같은 실천 방한의 일환으로 고종 황제의 특명을 띠고 1906년 8월 헤이그로 가는 도중에 만주로 북상하여 한민족이 개척한 북간도 중심지 용정(龍井)에 근대적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완전 본인의 사비로 운영하도록 개숙함으로서 당시 백만 인구의 한민족이 교류하며 살아가는 서북 간도및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 지방에 민족주의 교육을 펼침으로서 조국 광복운동의 기지화를 펼쳤다.
물론 다음해인 1907년 헤이그로 가시며 선생의 동지인 여준(呂準)등에 맡겨져 잠시 운영되였으나 곧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폐숙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건립의 목적과 이념은 이어져 가까이는 명동학교(明東學校)와,서간도의 신흥학교 (新興學校),동북만의 대전학교(大甸學校)로 이어져 멀리는 국내의 각 지방마다 한민족이 살아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민족주의 교육이 확대되어 수많은 광복전선의 역군이 배출되였떤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 6월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세계만국 평화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선생께서는 대한 제국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참석해서 한국의 주권수호와 국망(國亡)을 저지 할려고 최후의 구국 외교인 밀사행에 온갖 고초를 겪어면서 회의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국력의 뒷바침이없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협상 성격을지닌 이 회의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다.
그러나 선생으로서는 일제에 짓밟히는 한국실정을 국제공의(公議)에 제기하고자 최선을 다하셨고 아울러 그길로 윤병구(尹炳球),이위종(李瑋鍾),송헌주(宋憲澍)등을 대동하여 영국,불란서,돋일,미국, 러시아 제국을 순방 하면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에 관건임을 주장하고 나아가 한국의 영세중립(永世中立)을 역설 하시었다.
1909년 봄까지 이와같은 선생의 폭넓은 국제적 활동이 민족수난에 접어든 한국민족의 독립문제를 비로소 국제정치에 제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선생께서는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두의사의 샌프란 시스코 의거전후 미국내 한인사회 규모가 큰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 시스코에가서 하와이와 미주본토및 멕시코를 포함한 당시 7천여 한인사회의 단합과 조국독립 운동에 헌신해줄것을 제창 하시었다. 그결과 태평양 연안의 한인 사회는 물론 멀리중국 본토와 서북 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 그리고 연해주의 한인 사회까지 호응을 일어켜 동서에서 조국독립 운동의 의기(義氣)를 떨치게되는 계기가 마련되 해외 한인사회의 민족주의가 성장하게된다.
이무렵 선생은 샌프란 시스코 공립 회관에 머물면서 각지의 한인사회 자치와 조국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추기관인 대 한인 국민회(大 韓人國民會),건설에 "은연히 고문이되어 대사를 협찬"하고 계시었다.
그후 1909년 여름 러시아의 시베리아 연해주에 망명지를 정하고 13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聲明會), 권업회(勸業會),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등을 조직 지도하며 일제와의 일관된 항일운동을 전개하시었다.
더욱이 성명회에서는 1910년 8월 일제의 소위 한일합병조약 반대와 무효와 운동을 전개하고 미국, 중국,러시아등, 대한제국과 수교하였던 모든 나라에 대하여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히는 성언서를 보내기도 하시었다. 그래서 선생은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등,8,624명에 달하는 조국 광복 운동자의 서명이 붙은 이 선언 서에서 "우리는 세계속에서 대한국의 국호를 지키고,한국민은 대한국인민(大韓國人民)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않을것이다. 우리는 기필코 광복에 도달할때까지 일본 침략자와 혈전(血戰)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조국 광복의지를 천명 하시었다.
선생은 이같은 활동을 기반으로 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정재관(鄭在寬),이종호(李鍾浩)등과 함께 시베리아 연해주와 압록강,두만강 너머의서북 간도및 멀리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교우하는 모든 해외 한민족을 조직하여 항일 독립 운동의 터전으로 삼고 1914년에는 연해주에 국권 상실후 최초의 망명정부 이름을정할 대한광복군 정부 (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고 국내외 민족운동을 총괄하시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후 세계 제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틈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일제와 러시아의 합동탄압으로 표면적 활동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와같은 상황하에서도 조국 광복을위한 혈전의 준비는 멈추지 않고 신한 혁명당의 조직과 활동을 통하여 국내와 연계하며 중국과 러시아 영내에서 은밀히 추진 되었다. 하지만 보재 이상설 선생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1917년 음력3월2일 연해주 우스리크에서 48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천추의 한을품어신체 서거 하셨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몸이 약한편 이긴 하셨지만 12년동안 해외 망명으로 자기몸을 돌보지 않으신체 오로지 조국 광복에 심신을 모두바친 까닭에 1916년 부터 피를토하는 중병으로 병석에 계셨고 따라서 1년여동안 투병하시다 효험이 없어시자 임종을 지켜보고있떤 이동녕,이동휘,동지등에게 ""여러분이 합세하여 기필코 조국 광복을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수 있어랴. 내몸과 모든 문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재마져 강에날린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같은 유언을 남기셨다.
그러나 비록 이상설 선생은 가셨지만 그의 유업은 커서 선생이 서거하신지 2년뒤 세계1차 대전이 종결되고 3.1운동 이라는 거족적 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선생의 가까운 동지 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회영(李會榮),李始榮). 조성환(曺成煥)등은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여 중국 상하이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 국내외 독립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또한 선생이 오랫동안 망명하셨떤 시베리아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大韓國民議會)가 결성되어 조국 독립을 새로이 다짐하면서 일제와의 혈전을 선언하였고,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 에서는 그동안 양성된 광복군을 바탕으로 대한군 정부가 세워지고 여러 독립군단도 항전 체제로 정비되어 1920년대 독립군의 강인한 항일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미주의 한인들은 독립 대회를열어 세계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외치고 군자금을 모았어며 국내에서는 민족 의식의 새로운 각성과 민족 역량의 향상을 꾀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선생의 유업인 한민족의 광복이 보다 밝게 비쳐진 것이다.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국사 교과서에 선생의 독립운동 사적이 수록되 자라나는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그리고 향리에는 숭렬사(崇烈祠)를 비롯하여,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선생의 전람관과(李相卨先生歷史展覽館)과 연해주 우스리스크 연해주에 유허지(遺墟地)에 순국기념비,등이 건립되어 숭모사업이 펼쳐지고 있어며, 비록 혈육은 부인 달성서씨(達城徐氏),사이에 장남 정희(庭熙)와 갑희(甲熙),가희(家熙),2녀를 두는데 그쳤지만 그분의 민족정기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것이다.
이상은 인하대 윤병석 명예교수가 찬한 선생의 사적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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