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참의 이경선 전사일기.

2011. 8. 30. 21:48▣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인물


삼전도(三田渡)의 치욕(恥辱)을 막아내다. 장열(壯列)히 순절(殉節)한 남포현감 이경선(藍浦縣監 李慶善)

공의 초휘(初諱)는 경징(慶徵)이요.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藍浦), 오촌공(梧村公) 대건(大建)의 손(孫)이며 충익공 벽오 시발(忠翼公 碧梧 時發)의 아들로 1600년(선조 33) 5월 초(初) 2일 출생.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병자호란시 광주 검천 전투(廣州 儉川戰鬪)에서 장열히 순절하니 향년 37세 였고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묘는 충북 진천읍 산척리 산22-18(산직마을), 신자원(申座原)이고 묘갈(墓碣)과 정려문(旌閭門)이 있다.

1624년(인조 2) 사마(司馬)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1633년(인조 11) 11월 17일 계유 식년방 33인중 10등으로(을과 7등)문과급제 하여, 교서(校書), 교리(校理), 저작(著作),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한후 1636년(인조 14) 1월에 남포현감 겸, 홍주진관 병마절제사( 洪州鎭管 兵馬節制使)가 되었다.

1636년(인조14) 12월 14일 북녘 오랑케 청 태종 홍타시(弘他時)가 난을 일어켜 1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서울로 물밀듯 쳐들어 오자 미쳐, 막아 내지를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夢塵)하여 들어가니 때는 추운 겨울밤 9시였고 인조께서는 민익진(閔益震)에게 명하여 삼남(三南)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출전하라 하였다.

이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충청도내의 병마를 불러 모으고 각 읍수령(各邑守令)들과 찰방(察訪)들도 불러모아 남포현감 이경선을 참모로삼고 전(前)참판(參判)인 무인 최진립(武人 崔震立)을 좌영장, 심일민(沈逸民)을 우영장(右營將)에, 별장에 황박(黃珀), 중군에 이건(李楗),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에 이상재(李尙載), 군기 차사원(軍器 差使員)에 연산현감 김홍익(連山縣監 金弘翼),심약(審藥)에 이시량(李時亮)을 삼고 출전했는데 벼슬한 사람이 140명이고 잡색군(雜色軍)이 2432명이였다.

수원산성으로 들어가 적정을 정찰하며 전진하여 12월26일 헌인능으로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적세가 크게떨쳐더 나가지 못하고 광주 검천(廣州 儉川)에 진(陣)을 머물렀다.그 이튼날 12월27일 이른아침에 적병은 높은 봉우리로부터 내려오는 짙은 안개를타고 급습해왔다.

불의에 급습을 당한 아군은 혼란에빠져 지탱을 못하고 감사 정세규(監司鄭世規)는 절벽아래 구렁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간신히 살아났고 이상재,최진립, 황백, 이건,이시량은 죽은곳을 알수없었다.이경선과 김홍익만은 여전히 적과 싸우며 손에잡고 있떤칼로 거추장스런 옷자락과 옷소매를 잘라버려 몸놀리기에 편하게하고 몸을바쳐 나라를 돕고 여기서 죽자는 결심이였떤 것이다.

군량미를 쌓아놓고 노적(露積)가리로 올라가 우뚝히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독전(督戰)하였고 물러서는 병사가 있으면 그자리에서 칼로 쳐버렸다. 창끝과 살촉이 서로마주치는 데서도 흩어지지않고 적을 무찌러며 버티고 싸운것은 이경선과 김홍익의 힘이었떤 것이다.

군중(軍中)이 놀라고 어지러워진데다 이미 주장(主將)을 잃었으므로 서로 밟고 밟히며 흩어지기 시작했다.이경선은 큰소리로 병마절제사가 여기있다. 도망가는 자는 참한다고 외치며 몸을날려 뒤쫓아가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겁에질려 전의(戰意)를 잃고 무너지는 진세(陳勢)를 돌이킬수는 없었다.

전세를 알아차린 공(公)은 여기서 죽자 결심하고 곧바로 노적(露積)가리위로 되돌아와서 칼을고쳐잡고 달려드는 호병 십여명(湖兵 十餘名)을 치고서 말아래로 떨어졌다.급히 다시일어나 또 수명의 호병을 쳐죽이니 호병들도 두려워서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이렇게 싸우던중 불행히도 칼이부러지는 바람에 적에게 살해(殺害)되었고 김홍익도 여기서 전사하였으니 12월 27일이였고 이는 군중에서 직접 눈으로 본 병사들이 전(傳)한 말이다. 이듬해 1637년 1월19일에 가서야 형 경충공(兄 慶忠公)이 소식을듣고 시신(屍身)을 �아 거두워 본적 온몸이 창자국 투성이었고 성한곳이라곤 없어서 형용(形容)을 알수가 없었다.

다만 차고있떤 혁낭(革囊)과 병부(兵符)가 시신과같이 있었고 노적가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판별(判別) 할수가 있었떤 것이다. 진중(陳中)에서 죽은사람이 늘려있었건만 유독 이경선과 김홍익의 시신만이 이같이 참혹(慘酷)하고 잔인(殘忍)하게 창에 찔린 것은 싸움에서 시종(始終)물러서지않고 독전(督戰)하며 많은호병을 쳐죽였기 때문에 앙갚음으로 죽은 뒤에도 난자(亂刺)한것이 틀림없고 여러백명(白名)이 전하는바도 이를 밑바침 해주고있다.

대군(大軍)이 이미 무너지고 주장(主將)의 통솔(統率)도 없는데 이경선과 김홍익은 지방의 말단(末端) 관료(官僚)로서 죽어 마땅할때 죽지않고 욕(辱)되게 살기를 탐하여 살기를 꾀하는것을 오히려 부끄러이 생각하고 더욱굳게 적에 대항한 숭고(崇高) 한뜻과 몸에는 수십군데나 창에 찔리면서도 죽는것을 마치 자기집에 돌아가는 것과같이 가벼이 생각 하였으니 공(公)의 죽음은 어찌 그리도 장열 하였떤가!

공의나이 37세로 한참 일할나이였건만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쳤떤 것이다. 경술 1730년(영조6)9월에 왕명으로 정려(旌廬)를 세워라 명하여 이해11월 용인 공세곡 동구(龍仁 貢稅谷 洞口)에 정려(旌閭) 를 세웠다.

찬인미상(撰人未詳)
참고문헌 : 조선왕조 실록,

경주이씨 금석록(1868년간).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간행 표암지 8편.

나만갑.저. 병자록(羅萬甲. 著. 丙子錄)

남한일기(1992년간 광주 문화원)

헌 인 능 : 조선 제3대 태종과 그의비 원경왕후의 능(현지명:서울 서초구 내곡동)

전 사 지 : 검천(儉川)은 오늘날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낙생저수지 아래임.

잡 색 군 : 평소 군역의 의무가없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조직된 군사를 말함)

남 포 현 : 남포현(藍浦縣)은 오늘날 충남 보령시 남포면을 말함.

몽 진 :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곳으로 자리를옮김.

정 려 : 충신 정려(旌閭)는 오늘날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입구에 세워져 있었으나, 왜정시대 일본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에 의거 소실되고 없어졌으나 2005년 11월경 진천군에서 진천읍 산척리 산22-18 공의 묘소아래 건립 예정이다.

옮긴이 : 야촌 이재훈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 경주이씨유래 > 경주이씨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좌랑공 이 오(佐郞公,李 鰲)  (0) 2011.08.30
회와공 이인엽  (0) 2011.08.30
보재 이상설(1870-1917)선생의 행적.  (0) 2011.08.29
혜비(惠妃)  (0) 2011.08.29
이희수(李喜秀)  (0) 2011.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