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암(평리)공파 소개 [성암(평리)열헌공사단비 역문]

2011. 8. 16. 10:54▣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

誠庵(評理)悅軒公祀壇碑譯文[성암(평리)열헌공사단비역문]

 

牛峰 桃李村(우봉 도리촌)의 墓壇(묘단)은 곧 경주 이씨 평리(評理)이공 悅軒 핵(열헌 핵:열헌은 호,핵은 이름) 그 배위 정부인 김씨 차자 檢校 政丞(검교정승) 東庵 진(동암진:동암은 호,진은 이름) 대제학 松巖 世基(송암세기) 및 그 자제 尙書 過(상서 과:상서는 이조의 판서,과는 이름)등 三(삼)세에 걸친네 어른의 묘소를 실전하여 대신 단을 세웠으니 옛날의 산소를 바라보는 지점에다 묘단을 세웠던 고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받들고 공경하는 정성을 펴는 장소다.

 

불행히도 세대가 오래 되고 또 남북이 갈리어서 異域(이역)이 되었으니 자손들 중에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참배하여 그 성의를 베풀 수가 없다. 그리하여 후손 相祺(상기)가 슬퍼하는 마음으로 그의 族兄(족형) 相俊(상준)에게 상의하여 제창하여

말하기를「따로 이남에다 단을 설치하여 천고에 맺힌 한을 푸는 것이 좋을 것이니 悅憲公(열헌공)의 장자 評理公 仁挺(평리공 인정)과 그 후손 진사 松灘 원(송탄 원)의  묘단 위에다 묘단을 설립 합시다.그렇게 하면 祖孫(조손:할아버지와 손자)간에 서로 기맥이 통하고 응할 것입니다」고하였다. 생각컨데 우봉은 서해에 임해 있는 현재의 金川郡(금천군)이니 거리가 千(천)여리 된다. 바람도 통하지 못할 정도이니 자손들이 그 지성을 풀 수 없다.

 

相祺(상기)의 말이 또한 천리면으로 보던지 인정상으로 보아 반드시 나올 만한 말이다. 누가 이것을  억지로 막을 수 있겠는가? 지금 세상이 예의와 의리와 삼강 오상을 보기를 흙이나 풀같이하여 부모도 존중한 줄 모르고 친한 줄을 모르니 황차 세대가 아득한 선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相祺(상기)의 말은 근본을 생각하는 뜻에서 선조를 추모하여 제사를 받든다는 양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기록하여 하늘의 이치를 밝히며 사람의 마음을 바루는 표준을 세운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여 살펴보니 評理公(평리공)이 깊은 仁(인)과 큰 덕이 있고 관작도 높았다. 忠烈王(충렬왕)이 친히 시험을 보이매 東菴(동암)과 松菴(송암) 양 공이 다 선발되었다.

 

왕이 黃牌(황패:왕이 내리는 상장.옛날에는 왕은 황색의 종이를 썼다. 소과의 敎旨〈교지〉는 백색을사용하기 때문에 白牌〈백패〉라 하고,대과의 교지는 붉은 색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紅牌〈홍패〉라고 하였다.)를 내려 주어 총애하였다. 그때 그 시험에 합격한 것을 「天場合格(천장합격:천장은 왕이 직접 보인 과거장이라는 뜻)」이라고불렀다.

 

閔 默軒 漬(민 묵헌 지:묵헌은 호.지는 이름.자는 龍涎〈용연〉.고려조에 문과 급제.本朝 綱目(본조강목)을 저술하였고 시호는 文仁〈문인〉이다.)가 시를 지어 찬양하였으니 한 집안 셋 댁에서 다섯 장원하였으니 모두들 말하도다 이 태백의 제주라고 이것도 또 자손들이 선조를 생각하고 덕을 닦는 재료가 될 것이다.아울러 기록하여 둔다.

단은 古阜(고부)서쪽 蓮花峰 卯坐(연화봉 묘좌)에 있다.

                                                                                    

安東 權純命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