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군공파 소개 [김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역문]

2011. 8. 16. 11:00▣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

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譯文(김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역문)

 

고려(高麗)의 말기에 이르러 성대한 덕과 훌륭한 도량으로 큰 벼슬에 오르고 군읍(郡邑)에 봉군되어 당시에 빛이 나고 백세(百世)까지 방명(芳名)을 남기었으며, 그 후손도 번창하여 우리 李氏 大派(이씨 대파)의 조상이  된분이 있으니, 金紫光祿大夫 三重大匡 尙書左僕射 月城君(김자광대부 삼중대광 상서좌복사 월성군)이다.

 

公(공)의 휘는 之秀(지수)이니 慶州李氏(경주이씨)는 모두 新羅(신라)때에 六部村長(육부촌장) 휘 謁平(알평)으로 시조를 삼아 대대로 귀하게 되고 현달 하였다.

 

中世祖(중세조)의 휘는 居明(거명)이요 벼슬은 蘇判(소판)이다. 휘 金現(김현)을 낳으니 兵部令(병부령)이요, 휘는 金書(김서)를 낳으니 비로소 高麗(고려)조정에 벼슬하고 新羅 敬順王(신라 경순왕)의 따님에게 장가 들어 배위를 삼았다. 여러 대를  내려와 휘 申佑(신우)는 兵部侍郞(병부시랑)이요, 八世(8세)를 내려와 병부상서(병부상서) 휘 忠堯(충요)는 공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原州李氏(원주이씨) 貞茂(정무)의 따님이다.

 

공이 二子를 두었으니 맏이 採(채)는 忠惠王(충혜왕) 조정에서 벼슬이 四宰(사재)에 이르고 시호는 貞烈(정열)이요, 다음 縉(진)은 宰臣(재신)이다. 採(채)는 元林(원림)을 낳았으니 司僕寺判事(사복사판사)요 縉(진)은 允聃(윤담)을 낳았으니 司議署令(사의서령)이다. 元林(원림)의 아들 蔓實(만실)은 太宗朝(태종조)에 文科(문과)로 吏曹判書(이조판서)이고 延實(연실)은 縣監(현감)이다.

 

이때부터 혁혁한 문벌과 학문 절의가 대대로 계승하여 끊기지 않았으니 특별히 그 현달한 자를 들어서 기록하자면 蔓實(만실)의 맏자제 從直(종직)은 증직이 判書(판서)로 鷄川君(계천군)을 봉하고 둘째자제 良直(양직)은 文科(문과)로 司諫院(사간원)을 지나 禮曹判書에 이르고 셋째 자제 繩直(승직)은 文科(문과)로 慶尙道(경상도) 觀察使(관찰사) 大司憲(대사헌)에 이르고 淸白(청백)으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다.

 

從直(종직)은 二子(이자)를 두었는데 吉祥(길상)은 縣監(현감)이 되어 善政(선정)으로 알려졌고 陽生(양생)은 世祖朝(세조조)에서 敵愾(적개)의 공로로 鷄城君(계성군)을 봉하고 吉祥(길상)의 五世孫(오세손) 弘震(홍진)은 光海(광해)때를 당하여 三角山中(삼각산중)에 은거하여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는데 仁祖(인조)가 반정하매 潛底(잠저)의 옛 정의로 여러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으므로  處士(처사)의 칭호를 받았고 陽生(양생)의 자제 泰岳(태악)은 戶曹判西(호조판서)로 鷄善君(계선군)을 봉했으며,鷄善君(계선군)의 자제는 正憲大夫(정헌대부) 知中樞(지중추) 鷄興君(계흥군)이다.

 

陽直(양직)의 자제 思剛(사강)은 문과로 大司成(대사성)인데,扈駕(호가: 왕을 모시고 도망감)한 공로에 책록 되었고, 그 아우臻剛(진강)은 府使(부사)이다. 思剛(사강)이 二子(이자)를 두었는데 李孫(이손)은 문과 執義(집의)인데 端宗(단종)이 王位(왕위)에 쫓겨남을 보고 아우 未孫(미손)으로 더불어 같이 落南(낙람)했는데 형은 湖西(호서) 禮山(예산)의 花山(화산)아래에 터를 잡고 아우는 湖南(호남) 南原(남원)에 정착하여 時(시)를 지어 맹세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李孫(이손)의 六世孫(육세손) 億(억)이 南漢山城(남한산성)의 전쟁에 白衣(백의)로 군사를 따라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淵宗(연종) 壬午年(임오년)에 旌門(정문)을 명했다. 繩直(종직)은 五子(오자)를 두었으니 不敏(불민)은 判官(판관)이요,命敏(명민)은 증직이 戶曹參判(호조참판)이며,시호는 忠敏公(충민공)으로 莊陵朝(장릉조)에 士壇(사단)에 배향 되었고 勿敏(물민)은 主簿(주부)요,時敏(시민)은 호가 琴湖(금호)인데 재주가 특이하여 세상에서 神童(신동)으로 칭하고 강개하여 氣節(기질)이 있었는데 光陵(광릉:世祖의陵)이 왕위에 오르매 永嘉(영가)의 琴溪村(금계촌)으로 내려가서 金매月堂(김매월당)이 琴湖高士(금호고사)라는 액자를 써주었다.

 

琴湖公(금호공)이 四子(사자)를 두었으니 崇準(승준)은 忠順衛(충순위)요 宗準(종준)은 호가 傭齋(용재)인데 湖堂(호당)에 뽑혔고,학문이 세상에 울리었는데 金沾畢齋(김첨필재)의 문인으로 1498戊午年(무오년) 士禍(사화)를 당했다. 다음은 弘準(홍준)이요 호가 訥齋(눌재)인데 成均進士(성균진사)로 또한 학행이 있었고, 자기의 墓誌文(묘지문)을 지어 세상에서 일컫게 되었고 兄弟(형제)가 같이 栢麓祠(백록사)에 배향되어 세상에서 雙珠(쌍주)라 칭하였다. 다음은 公準(공준)이니 訓導(훈도)라. 아! 공이 高麗朝(고려조)에 世祿(세록)의 신하로 벼슬이 一品에 이르러 영광된 이름이 朝野(조야)에 가득 하였고 손자와 증손에 이르러 公卿(공경)을 지낸 분이 손가락을 굽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땅히 國史(국사)와 家牒(가첩)에 기재하여 天地로 더불어 같이 전할 것인데 高麗(고려)가 망함으로부터 文獻(문헌)이 유실된 자가 十에서 八~九분이나 되니 차마 말할 수 가 있으리요. 그러나 수 백년을 내려 오면서 자손이 팔도(팔도)에 분포하여 사는 자가  그 숫자를 세지 못 하겠으니 덕이 두려우매 流派(류파)가 더욱 빛이 나므로 여기에서 공을 헤아릴 수가 있다.

 

사적이 전하지 못한 것이 공에게 무슨 加損(가손)이 있겠는가? 여러 후손들이 추모하고  보답하는 정성을 펼 곳이 없으므로 한을 삼아 급히 설단 하고 제사 지낼 것을 도모하여 비석의 銘文(명문)을 나에게 청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秉筆家(병필가) (남의 글을짓는 큰 文學家)가 없으니, 자네가 同宗(동종)간이 되었은 즉 행여나 모른체하지 마오』한다.

 

저으기 생각컨데 동의 세대가 요원하여 生卒(생졸)의 연도와 배위까지도 모두 근거 삼을 바가 없으니 어찌할까, 壇所(단소)는 後孫(후손)이 거주하는 고장 安東郡琴溪面仕望里(안동군 슴계면 사망리)에 있고, 나를 찾아와 銘文(명문)을 청하는 자는 成鎬(성호). 在英(재영), 龍濬(용준)이요 처음부터 끋까지 일을 주선하는 자는 寅鎬(인호), 東鎬(동호), 台永甫(태영보)이다. 銘(명)으로 이어서 이르기를, 아 ! 月城君(월성군)이여 高麗(고려)의 世臣(세신)이네,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기니 文彩(문채)와 덕을 갖추었다.

 

벼슬은 일품에 이르고 명망은 모든 사람에게 흡족 하였네, 땅을 주어 月城君(월성군)에 봉하니 경례와 대우가 아울러 지극했구나, 음덕이 후손에게 흘렀으니 천년에 무궁하리라. 원천이 깊고 流派(유파)가 길으니 文官­武官(문관;무관) 그리고 儒賢(유현)이 배출하였네, 세대가 요원하므로 文獻(문헌)의 징빙이 없네, 生卒年度(생졸년도)와 墓所(묘소)조차 어찌하여 모두 인몰 되었던가? 자손이 번창하니 느끼는 생각 더욱 새로웠고, 단을 모아 제향을 올리니 여러 의사 일치되었네. 위토와 제실을 마련하고 재게 하며 제사 올리었네, 내가 명(명)을 지어 좋은 비석에 새기노라.

 

丙寅1986年 11月 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