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유래/경주이씨소개(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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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공파 소개
원(元)나라의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영정. 국보 제110호. 1319년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제현은 정주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충선왕(忠宣王)과 함께 중국에 있을 때는 특출한 품성과 학식으로 원나라 조야(朝野)를 놀라게 하였다. 중국에 머물 때 그려진 이 영정은 오늘날 고려시대의 희소한 유품으로 남아 있는데 원나라 때의 화풍을 전하는 중요자료이다. 경주이씨 익재공파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3년)~1367(공민왕 16년) 고려의 문신.학자.시인.초명은 지공(之公)자는중사(仲思),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역옹, 시호는 문충(文忠).검교정승(檢校政丞) 진의 아들.백이정의 문인1301년(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詩)에 장원,..
2011.08.16 -
월성군공파 소개 [김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역문]
金紫光祿大夫月城君祭壇碑銘譯文(김자광록대부월성군제단비명역문) 고려(高麗)의 말기에 이르러 성대한 덕과 훌륭한 도량으로 큰 벼슬에 오르고 군읍(郡邑)에 봉군되어 당시에 빛이 나고 백세(百世)까지 방명(芳名)을 남기었으며, 그 후손도 번창하여 우리 李氏 大派(이씨 대파)의 조상이 된분이 있으니, 金紫光祿大夫 三重大匡 尙書左僕射 月城君(김자광대부 삼중대광 상서좌복사 월성군)이다. 公(공)의 휘는 之秀(지수)이니 慶州李氏(경주이씨)는 모두 新羅(신라)때에 六部村長(육부촌장) 휘 謁平(알평)으로 시조를 삼아 대대로 귀하게 되고 현달 하였다. 中世祖(중세조)의 휘는 居明(거명)이요 벼슬은 蘇判(소판)이다. 휘 金現(김현)을 낳으니 兵部令(병부령)이요, 휘는 金書(김서)를 낳으니 비로소 高麗(고려)조정에 벼슬하고 新羅..
2011.08.16 -
석탄공파 소개 [석탄선생 사단비명 역문]
石灘先生祀壇碑銘譯文(석탄선생 사단비명 역문) 아! 선생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인물이다. 평생의 志節(지절)을 보건대 烈日秋霜(열일 추상)보다도 凜凜(늠늠)하고 泰山喬嶽(태산교악)보다도 높으니, 하늘이 선생을 낳게 한 것이 우연치 않은 것이다. 高麗末期(고려말기)에 國政(국정)이 문란하여 요망한 辛旽(신돈)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니 선생과 같은 直道(직도)가 어찌 협박을 당하고 夭死(요사)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高麗 五百年 諫官(간관) 중에 제일가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고 알게 된 것이다. 先生(선생)은 慶州李氏(경주이씨)니 新羅(신라) 佐命大臣(좌명대신) 휘 謁平(알평)으로 始祖(시조)를 삼고 휘 淑眞(숙진)은 尙書中丞(상서중승)이요, 휘 芮(예)는 監察糾正(감찰규정)이요, 휘 孫寶(손보)는..
2011.08.16 -
성암(평리)공파 소개 [성암(평리)열헌공사단비 역문]
誠庵(評理)悅軒公祀壇碑譯文[성암(평리)열헌공사단비역문] 牛峰 桃李村(우봉 도리촌)의 墓壇(묘단)은 곧 경주 이씨 평리(評理)이공 悅軒 핵(열헌 핵:열헌은 호,핵은 이름) 그 배위 정부인 김씨 차자 檢校 政丞(검교정승) 東庵 진(동암진:동암은 호,진은 이름) 대제학 松巖 世基(송암세기) 및 그 자제 尙書 過(상서 과:상서는 이조의 판서,과는 이름)등 三(삼)세에 걸친네 어른의 묘소를 실전하여 대신 단을 세웠으니 옛날의 산소를 바라보는 지점에다 묘단을 세웠던 고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받들고 공경하는 정성을 펴는 장소다. 불행히도 세대가 오래 되고 또 남북이 갈리어서 異域(이역)이 되었으니 자손들 중에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참배하여 그 성의를 베풀 수가 없다. 그리하여 후손 相祺(상기)가 슬퍼하는 마음으로 그의..
2011.08.16 -
말년 불우했던 백사 이항복 유배생활
백사 이항복 하면 ‘오성과 한음’을 떠올리며 유쾌하고 행복한 일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음 이덕형과의 일화는 어린 시절 한때에 불과하다. 실제로 ‘백사집’이나 ‘한음문고’ 어디에도 만화 ‘오성과 한음’ 속에 등장하는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는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모두 정승 자리에 오를 정도로 출세한 삶을 살았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1617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한 사건은 잘 나가던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다. 폐위를 반대했던 이덕형은 벼슬에서 쫓겨나 지방에 내려가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던 이항복은 더 불우했다. 함경도의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지 5개월 만에 병사했기 때문이다. 이항복의 삶과 생각은 그의 문집 ‘백사집’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책에..
2011.08.16 -
재치와 익살의 오성
이항복 신도비 재치와 익살의 오성 오성은 40여 간의 관직 생활을 임진왜란과 극심한 당파싸움에는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재치와 익살로 늘 웃음을 뿌린 인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있었던 일이다. 김상궁이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제사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해 임금과 대신들에게 잘 차린 제사 음식을 한상씩가져 왔다. 대신들은 시장한데다 피난길에 만나는 기름진 음식이라 침을 삼키면서 대들었다. 그러나 가장 나이가 많은 재상 윤두수가 들어오지 않아서 다들 기다렸다. 그렇다면 나 혼자서라도 먼저 먹겠소이다. 다들 말렸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항복은 우적우적 배불리 먹었다. 그 윤두수는 임금을 만나고 있었다. 전쟁으로 백성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도 배를 곯는 판인데 일개 상궁이 아비의 제사 음식을 이처럼 ..
2011.08.16